[응급실 24시 르포] ③ 중증환자 외면한 경증환자들…"나 먼저 진료" 아우성

입력 2019-05-08 06:00   수정 2019-05-08 06:39

[응급실 24시 르포] ③ 중증환자 외면한 경증환자들…"나 먼저 진료" 아우성
중환자 심폐소생술로 처치 늦어진다는 공지에도 "왜 기다리게 하나" 항의
"응급실 진료는 접수순 아닌 중증도 순…중증 구별 전화상담 활성화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잔디 기자 = "(아이가) 해열제는 먹었는데, 걱정돼서…."
지난달 30일 낮 1시 30분. 서울대학교병원운영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이하 서울대보라매병원) 응급의료센터 구석에서 의료진과 보호자 사이에 작은 설전이 벌어졌다.
아이가 열이 나기에 해열제를 먹이고도 걱정이 돼 응급실로 왔다는 보호자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아이를 두고 의료진이 "어머니, 이미 해열제를 먹었다면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라고 하자 보호자는 "검사라도 해주시면 안 되나요"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날 응급의료센터에서 만난 간호사, 의사 등 의료진은 굳이 응급실에 내원하지 않아도 되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평일 낮인데도 설사, 감기 등 증상으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눈에 띄었다.
한 80대 할머니는 동네의원을 찾았다가 "이틀 치 약을 먹고도 차도가 없으면 이후에 큰 병원에 가보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기다릴 게 뭐 있나. 시설 좋은 병원에서 검사받으면 좋지'라는 생각에 응급실로 방문했다고 했다.
의료진은 경증환자가 많아지면 응급실 과밀화를 부를 뿐만 아니라 위급한 환자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말 한마디 하기도 어려운 위기상황의 중증환자와 달리 경증환자는 진료 순서 등의 불만으로 소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옆에서 생사의 기로에 놓인 환자가 있어도 "나 먼저 봐달라"는 곳이 바로 응급실이라고 했다.

응급실 근무 6년 차인 김현지 간호사는 "CPR(심폐소생술)을 하는 응급환자가 있으면 다른 환자들은 처치가 늦어질 수 있다고 응급실 곳곳에 있는 모니터에 공지문을 띄운다"면서 "그런데도 '왜 내가 기다려야 하느냐'는 환자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응급의료센터 벽면 곳곳에는 '응급실 진료는 접수순이 아니라 중증도 순입니다. 사망 위험이 높은 환자의 빠른 치료를 위해 양해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처치 순서를 두고 의료진에게 폭언을 퍼붓는 환자들도 부지기수라는 게 의료진의 설명이다.
백승철 인턴은 "스스로 병원에 찾아온 환자가 당장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를 옆에 두고도 '왜 먼저 봐주지 않느냐'고 항의한다"며 "이렇게 되면 폭언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떠나 의사와 환자 간 신뢰 관계가 깨져 적절한 진료를 하기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의료진은 질환의 중증도를 판단하기 어려워 응급실로 찾아오는 일반인들의 우려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경증환자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고 하소연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 권역·지역 응급센터 내원한 1천만여명 환자 중 경증 또는 비응급환자는 57.3%에 달했다. 반면 중증 응급환자는 7.1%에 불과했다.
응급의료센터 초입에서 환자의 경·중증을 구분하는 박미리 초기평가담당 간호사는 "빨리 검사를 받고 싶다는 이유로 응급실에 방문하는 환자들도 종종 있다"며 "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방문한 환자 78명 중 실제 응급진료가 필요한 경우는 12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응급하지 않은 경증환자가 응급실에 들르면 진료비와 별개로 '응급의료관리료' 2만~5만원을 추가로 내야 한다. 정부는 이 돈을 실손의료보험으로도 보장받을 수 없게 했지만, 금지 대상은 상급종합병원 응급실 42곳에만 해당한다.
전문가들은 환자가 경·중증을 스스로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데 공감한다. 이에 따라 응급실에 무작정 내원하기 전 의료상담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한편 치료 적기를 놓칠 경우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 있는 심혈관계 질환 증상에 대한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신상도 대한응급의학회 정책이사(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응급증상이 정의돼 있지만 환자가 증상만으로 중증도를 판별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유럽, 일본 등에서 시행 중인 환자의 중증도를 전화로 파악해 적절한 의료기관을 연결해주는 상담 서비스를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해외에서는 (환자가) 걸어서 가는 응급실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중증환자 위주로 응급진료를 제공한다"면서 "다만 뇌졸중, 심근경색 등은 오히려 환자가 소화불량으로 오인해 응급실에 방문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심혈관계 질환 증상과 심각성에 대한 대국민 교육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정부는 현장의 고충을 살펴 오는 2020년 권역응급센터의 경증환자 방문을 억제하는 시범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밝힌 상태다.소방청에서도 비응급환자의 경우 무조건 구급차를 요청하기보다는 119상황실에서 제공하는 의료상담을 활용해 외래 진료나 문을 연 의원·약국을 방문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일반인들은 119에서 의료상담과 병원·의원·약국 안내 서비스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유경민 서울대보라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에 오지 않아도 되는 환자들이 몰리면서 의료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며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응급진료가 불필요한 환자가 오는 건 모두에게 소비적인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유 교수는 이날 퇴근도 못 한 채 24시간을 꼬박 근무 중이었다.

jand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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