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알리려 목숨 던진 열사, 광주가 함께 품자"

입력 2019-05-09 15:54  

"5·18 알리려 목숨 던진 열사, 광주가 함께 품자"
'전국의 5·18들' 주제 포럼서 "전국에서 5·18 관련 투쟁이 있었다"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1980년 광주는 외로웠지만, 그 이후의 광주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9일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전국의 5·18들'을 주제로 열린 5·18광주정신 포럼에 발표자로 나와 "5·18과 관련된 열사들이 호남 출신만 있었던 게 아니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5·18과 관련된 투쟁이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5월 항쟁 이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주화 열사 12명을 거론했다.
"당시 언로(言路)가 차단된 상태에서 열사들은 시위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충격적인 방법으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방법을 고심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박 소장은 12명의 열사 중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한 숭실대생 박래전 열사의 형이기도 하다.
그는 "5월 27일 새벽에 도청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전사들의 투쟁처럼,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른 투쟁을 불러내는 역할을 했다"며 "그렇게 80년 광주가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이어 "광주를 알리기 위해 한 몸 던진 열사들도 광주가 자신들의 역사로 함께 품어주는 것이 하나의 바람"이라며 "80년 광주와 그 이후 열사들의 투쟁은 5·18 역사 안에서 함께 이야기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온 고호석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는 "군사독재정권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려는 열망이 시민항쟁의 형태로 표출된 첫 출발은 부마항쟁이었다"며 "부마에서 출발해 광주에서 타오른 항쟁의 불꽃은 결국 87년 6월 항쟁의 승리로 일단락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관점을 견지해야 '전 국민의 5·18'이 제대로 와닿을 수 있고, 한국 현대사에 5·18의 위상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며 "5월의 광주를 논하려면 79년 10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in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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