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광주청문회 등 4차례 진상조사에도 여전히 미완
"어설픈 가해자 용서가 왜곡 세력 낳았다" 지적도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폭도'로 내몰았던 5·18민주화운동은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5·18 당시 현장에 있었던 피해자들은 계엄군을 앞세운 신군부가 저지른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반면 민주정의당(민정당·현 자유한국당) 측이 증인으로 내세운 당시 군 관계자들은 시민들의 과잉 시위를 탓하며 신군부가 내세웠던 '자위권 행사'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결국 교착상태에 빠진 광주청문회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구체적인 진상조사 보고서 하나 없이 끝을 맺어야 했다.
오히려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노태우 정권이 집권하던 상황에서 광주청문회는 군 기록을 광범위하게 왜곡·은폐하는 계기가 됐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5·18은 39년이 되는 지금까지 발포 명령 책임자와 암매장 등의 핵심 쟁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5·18의 진실은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 5·18특별법이 마련되고, 검찰의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지면서 드러나는 듯했다.
검찰은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와 계엄군의 지휘 체계 등을 확인하고 전 씨가 과잉진압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고 결론 내렸다.
특히 광주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포책임자는 현장 일선 지휘관이 아니라 전씨를 비롯한 신군부 지휘부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구체적인 발포 명령 책임자나 양민학살·암매장,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행태 등 핵심 사항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남아있는 의혹은 2005년 국방부 과거사조사위원회가 공을 이어받았다.
과거사위는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행위 등 일부를 밝혀내는 데 성과를 올렸지만, 여전히 발포 명령자와 양민학살 등에 대한 내용은 규명하지 못했다.
당시 과거사위는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며 실명을 보고서에 명기하는 문제를 두고 치열한 다툼이 내부에서 벌어졌지만 결국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못했다.
이후 2017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에선 군의 헬기 사격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하며 진전된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과거 군사정권이 철저하게 기록을 왜곡해둔 탓에 5·18특조위는 "가짜와의 전쟁을 치르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헤치며 5·18의 진실은 조금씩 드러낼 수 있었지만 역사적 단죄는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5·18을 비롯한 군사반란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씨는 구속된 지 2년 만에 사면받았고, 일부 핵심 군 간부를 제외한 나머지 책임자·가담자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밝혀온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이를 두고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가해자에 대한 어설픈 용서가 지금의 망언과 왜곡 세력을 낳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진상규명은 처벌을 위한 것"이라며 "처벌되지 않은 세력들은 반드시 반격에 나선다. 그렇게 역사가 왜곡되는 사례가 세계 곳곳에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전씨는 2017년 5·18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발포 명령을 정당화하는 회고록을 발간했다.
그는 북한군 특수군 개입 정황을 언급하며 39년 전 시민군을 폭도로 규정했던 주장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5·18 왜곡에 앞장서 온 지만원 씨 역시 5·18 기록사진 속 인물을 북한군이라고 주장하며 온·오프라인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발포 명령자 등 5·18의 남은 진상규명과 역사 왜곡을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5월 단체와 시민사회의 절박한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김후식 5·18부상자회 회장은 12일 "여러 한계 때문에 진실을 밝히지 못한 과거의 부메랑이 지금의 역사 왜곡과 폄훼로 돌아오고 있다"며 "이러한 잘못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과 역사 왜곡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in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