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노 고지 '청빈의 사상' 새 번역본 나와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이제 우리 사회에도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바람이 서서히 분다.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자는 얘기다. 이는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high thinking)'와 궤를 같이한다.
예부터 한·중·일 지식인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바로 '청빈(淸貧)'이었다. 말 그대로 '맑은 가난'.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간소한 삶이며, 소유의 욕망을 최소화함으로써 내면의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동일한 의미랄까.
일본에서 청빈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거품 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이 시작되던 1992년, 작가이자 평론가인 나카노 고지(中野孝次·1925~2004)는 현대의 물질 만능 풍조 대안으로 옛 선인들의 소박한 삶을 재조명한 '청빈의 사상'을 출간해 선풍적인 관심을 모았다.
당대의 이 베스트셀러는 옛 시인 마쓰오 바쇼, 문인 가모노 조메이, 화가 요사 부손 등 문학사와 예술사 거장들의 일화와 글을 통해 청빈의 삶이 안기는 기쁨과 홀가분함을 일깨워줬다. 나아가 인도 철학, 성 프란치스코, 에리히 프롬 등의 이론으로 청빈 사상의 가치와 효용을 뒷받침했다.
저자에 따르면 자발적 가난인 청빈의 꽃은 소유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피어난다. 예컨대 에도시대 예술가 혼아미 고에쓰 가문의 경우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유를 만끽했다. 고에쓰의 어머니 묘슈는 집안의 큰어른으로 성공한 자손들이 수시로 옷이며 용돈을 드렸지만, 그때마다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다. 이는 단순히 자선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가난한데 혼자만 많이 소유하는 걸 죄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마침내 마음은 물건의 노예가 돼버린다. 자유롭고 한가하게 나날을 보내기를 원한다면 물욕 따위는 버려야 한다. 물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람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산다는 것은 숫자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며 "소유를 아무리 늘려도 삶의 충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삶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깨달음, 빼고빼고 또 빼어 마음 하나만 남기는 삶이 청빈이라는 것. 그러면서 옛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했고, 죽은 후에 남길 것은 맑고 아름다운 이 삶의 원칙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됐음에도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으로 맴돌고 있어서다. 좋은 집, 좋은 차 등 '소유'에 집착할수록 평안, 즐거움 같은 '존재'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도 이런 청빈의 전통이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사상이 바로 그렇다.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선비들은 명리와 빈천을 떠나 자연, 예술, 인생이 혼연일체가 된 풍류의 삼매경을 일상에서 즐겼다. 하지만 청빈의 전통, 선비적 가치관은 현대 사회가 성장과 소비 등 물질적 가치를 향해 질주하면서 폄하되고 잊혔다. 유형 가치에 매몰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 무형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옮긴이 김소영 씨는 "속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갔던 옛 문화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만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빛나는 예술혼이다"며 "'맑고 가난한 삶'은 그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자세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일본 출간 이듬해인 1993년 우리나라에도 소개돼 눈길을 끌었으나 절판됐다가 이번에 출판사와 번역자가 바뀐 가운데 새로운 번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바다출판사 펴냄. 302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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