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산 영수증으로 신원 확인…"나가지 말라"던 가족 몰래 시민군 참여
제39주년 5·18 정부 기념식에서 사연 소개될 듯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기자 = "심부름 정도만 하고 있응께 걱정할 것 없당께"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에서 시 외곽으로 철수한 1980년 5월 21일 광주상고(현 동성고) 1학년생이던 안종필(16) 군은 시위대에 합류한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 이정임 씨에게 "군인들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는 마당에 또다시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막내아들에게 이씨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화가 버럭 났다.
이씨는 아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신발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옷은 죄다 물에 담가버렸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이씨는 그의 형에게 야단을 쳐달라고 당부했고, 형은 손찌검까지 하며 동생을 만류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종필이는 다음 날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종필이는 세 살이 되던 해 남편을 잃고 홀로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들을 찾아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닌 이씨는 24일 집 앞인 산수동 오거리 앞에서 시위대 차량에 올라있는 종필이를 발견했다.
함께 차에 타고 있던 시민군들은 차를 두드리며 "계엄군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종필이는 어서 차에서 내리라는 이씨의 애타는 당부에도 "도청에 들어갔다가 금방 갈게"라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가버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이씨는 도청으로 달려가 기어이 아들을 찾아내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들이 몰래 나갔다가 들어오지 않은 사흘 동안 혹시나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이씨는 결국 앓아누웠다.
배가 고프다며 밥을 달라는 종필이에게 밥도 차려주지 못하고, 링거까지 사다 맞아야 할 정도였지만 아들이 잠들 때까지 쉬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들이 잠든 다음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지만 다음 날 25일 아침, 종필이는 또 사라지고 없었다.
이씨는 더는 아들을 찾으러 다닐 기운이 없었다.
그것이 이씨가 종필이를 본 마지막이었다.
헬기와 중무장한 계엄군이 도청에서 최후항전을 하던 시민군을 유혈로 진압한 다음 날인 28일 경찰서로 사람을 보내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종필이의 사촌과 함께 찾아간 이씨는 차마 경찰서 안으로 발걸음을 들이지 못하고 사촌을 들여보냈다.
경찰은 종필이가 전날 도청에서 사망했다며 소지품을 확인하라고 했다.
"고모, 종필이에게 돈 준 일 있어요?"
기어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이씨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들은 며칠 전 양복점에서 산 교복 영수증과 500원을 남기고 온몸에 총상을 입은 채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프다던 그에게 밥도 제대로 차려주지 못한 그 날 밤이 어머니 이씨에겐 한으로 남았다.
식당을 하던 이씨는 아들을 잃은 뒤 식당 문을 걸어 잠그고 매일같이 망월동을 찾아갔다.
무덤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아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슬픔과 아픔이 조금씩 사그라들자 이씨와 종필이의 누나 안경순씨는 유족회 활동을 시작하며 5·18 진상규명에 누구 보다 앞장섰다.
그런 이씨 가족에게 신군부는 협박과 회유를 일삼았다.
특히 망월동에 쓴 종필이의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큰돈을 주겠다며 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유족회에 알려지게 되면서 한곳에 모여있던 5·18희생자들의 묘를 은밀히 흩어 놓으려고 했던 신군부의 공작이 드러나기도 했다.
결국 정권의 눈 밖에 난 이씨는 더는 식당을 운영하지 못하게 됐지만, 아들의 죽음을 욕되게 할 수는 없었다.
이씨에게 바람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종필이의 죽음을 잊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그의 바람은 이번 제39주년 5·18 정부 공식 기념식에서 사연으로 소개되며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기념식은 지난해부터 실제 사연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엮어내는 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한편 종필군처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학생 희생자는 16개 학교, 18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i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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