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35살 준식의 삶은 고달팠다. 도둑질해서라도 배를 채웠고, 학교 잔심부름꾼으로 시작해 교사가 됐다. 아홉 번의 실패 끝에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녹천역 아파트에도 입주했다. 수수한 아내, 명랑한 딸과 인생에서 만족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그때, 연락이 끊겼던 이복동생 민우가 찾아온다. 준식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난 14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개막한 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이른바 86세대의 청년기를 조명한 작품이다. 원작은 1992년 출간된 영화감독 이창동의 동명 소설이다.
녹천(鹿川)역은 노루가 살던 개천이란 뜻과 달리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불도저로 밀려 재개발됐고, 개천에는 공장 폐수가 흐른다. 무대 한쪽에 쌓인 흙이 주는 무게감은 대단하다. 실제로 배설물 냄새가 나진 않지만, 준식의 아파트가 얼마나 위태로운 허상 위에 위치했는지 끊임없이 환기한다.
준식의 이복동생 민우는 서울대를 자퇴한 운동권이다. 한 번도 노동해보지 않은 듯 손가락은 희고 가늘다. 준식의 아내는 점차 민우와 가까워지고, 아직도 대학생처럼 화사한 민우와 배 나온 준식을 저울질한다. 끝내 "이게 어디 사는 거예요?"라며 준식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준식은 녹천에 뿌리내린 잡초처럼 꼼짝할 수 없다. 그는 억울하다. 그저, 잘 살고 싶던 것뿐인데….
준식역으로 열연한 배우 조형래(37)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준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준식은 생존하기 위해 속이 비뚤어진 인물이자 마주하기 싫은 우리의 역사"라며 "변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젊은 우리가 꼰대라고 배척하더라도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한 세대라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 세대는 누구나 그렇게 살지 않았겠나. 항상 공연할 때 누군가를 위해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천장에서 흙이 쏟아지는 엔딩 장면에 대해선 "우리 모두 똥밭에서 살고 있지만 그걸 짊어지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말했다.
신유청 연출은 "잊고 지냈던 내 부모의 모습이 아른거려, 연습이 무르익어 갈수록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며 "그들의 삶에 진정으로 연민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새 세대 역시 넘어지고, 실수하고, 그 무지를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안은 채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유일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전했다.
공연은 6월 8일까지 계속된다. 3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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