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홍상수 감독의 스물세번째 장편영화 '강변호텔'. 처음 제목을 본 순간, 호기심과 상상력이 발동했다.
단순히 공간적 배경이 강변호텔은 아니겠지 생각했다. '강'(江)이 갖는 풍성한 메타포(metaphor)에 흥미가 솟구쳤다.
우선 단어의 조합이 눈에 띈다. '강'(江)은 흐르는 것이고 '호텔'은 머무는 곳이다. 두 개념은 충돌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연스럽게 호응한다. '흐르다 머무는 곳'이 강변호텔 아닌가. 어쩌면 그 자체가 우리들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서정인의 단편소설 '강'에는 물이 흐르는 강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강에 대한 묘사나 서술도 전혀 없다. 그런데 제목은 '강'이다.
소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 실개천이 바다로 흘러가는 게 우리네 삶이고, 결국 여기서 강은 인생이다.
정회성은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 "흐르는 것이 물 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일이 끝나 저물어/ 강물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라고 썼는데 그는 노동자나 민중의 한과 비애를 '흐르는 물'에 비유했다.
한남철이 쓴 소설 '강 건너 저쪽에서'에서 '강'은 중국식으로 말하면 '황천'(黃泉), 서양식으로 말하면 '레테(Lethe)의 강'이다.
소설 속 할머니의 죽음은 "나룻배를 먼저 탔기 때문에 앞서 떠나게 된 할머니가 강 저쪽에서 뒤의 행보에 타고 올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몇해 전 90대 노부부의 이별 이야기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나 가장 오래된 서정시로 공인받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강은 죽음이다.
삶이 되기도 하고 죽음이 되기도 하는 이 아이러니한 존재는 결국 삶과 죽음의 영속적인 반복도 의미하는데 그건 곧 '역사'가 된다.
시인 박두진은 강물이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역사의 물줄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 '강2'에서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이라고 썼다. 역사가 희망적인 미래로 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강물'을 통해 표현했다.
이런 역사에 대한 긍정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인 생명력으로 이어진다. 이는 영원과 불멸이라는 코드로도 읽힌다.
이청준은 소설 '흐르지 않는 강'에서 이같은 '소망과 생명의 강'을 꿈꾸었다. 그는 이 생명의 강이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해 소멸해 간다고 한탄하고 있다.
중국에선 예로부터 강의 본질인 '흐른다'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뒀다.
'도덕경'에서는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 뛰어나지만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라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법(法)이라는 한자어를 뜯어보면 '물'(水)과 '가다'(去)로 이뤄져 있다. 이는 법이라는 게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니 물이 흐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세상사의 원리인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화 '강변호텔'에서 주인공인 시인(기주봉 분)은 아무 이유 없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강변의 호텔에 묵으면서 오랫동안 안 본 두 아들을 부른다. (영화를 보면서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시인은 마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주인공인 노년의 소설가가 미소년을 쫓으며 그 신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하듯,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두 젊은 여자에게 "정말 아름다우십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기도 한다.
여배우와의 관계가 공개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이번에도 이러쿵저러쿵 해석이 분분하지만, 필자는 유독 '강변'에 자꾸 눈길이 간다.
촬영지인 남양주의 한 북한강변이라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강'이라는 일반명사가 자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faith@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