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노인동맹단 의거 100주년과 혐로 시대

입력 2019-05-29 09:00   수정 2019-05-29 09:56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노인동맹단 의거 100주년과 혐로 시대


(서울=연합뉴스) 1919년 5월 31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노인 5명이 군중 앞에 나타났다. 대표 격인 이발(이승규)을 시작으로 연설에 나서 일제의 만행을 꾸짖고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뒤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이 체포하려 하자 이발은 "치욕을 당할 수 없다"며 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이들은 당시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꼽히던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9년 3월 26일 결성된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의 일원이었다. 일본 천황과 조선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과 함께 노인동맹단 창립 취지문 수백 장을 품속에 지닌 채 서울로 잠입해 거사를 감행했다.

나이는 정치윤이 74세로 가장 많았고 이발 68세, 차대유(차대륜) 59세, 윤여옥 58세, 안태순 47세였다. 요즘과 달리 100년 전 평균 수명과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모두 어엿한 노인이었고, 특히 74세의 정치윤은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이었다. 당황한 일본 사법당국은 고령의 정치윤과 이발을 불기소 처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려보냈다. 윤여옥과 안태순은 징역 1년, 차대유는 징역 8개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3·1운동의 물결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가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벌이던 김치보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약방 덕창국에서 노인동맹단 발대식을 열었다. 김치보는 단장으로 선출됐고 홍범도와 유상돈 등 16명이 의사원에 선임됐다. 발대식이 끝난 뒤 노인동맹단은 새로운 단원 모집을 위해 각 지방으로 대표를 파견했다.

당시 김치보의 나이가 환갑이었고 그와 동갑인 민족지도자 박은식도 동참했다. 노인동맹단 가입 대상을 46세에서 70세로 정했으나 70세를 넘는 이도 있었고, 여성도 가세했다. 미국에 머물던 서재필에게 총재를 맡아 달라고 요청한 문서에는 2천5명의 명단이 적혀 있고 그 아래 지장·도장을 찍거나 자필로 서명했다.

노인동맹단은 대표자를 조선총독부에 파견해 독립 의지를 알리는 한편 결사대를 국내에 보내 3·1운동을 확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의 아버지 이발은 "나는 칠순이 가까운 노인으로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니 민족의 애국심을 더욱 고취하기 위해 조선 대지에 나가서 독립 만세를 부르겠다"고 자원했다. 이에 다른 단원 4명도 가세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완용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세 차례 글을 실어 "몰지각한 이들의 선동에 편승해 어린 것들이 망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깎아내렸다. 보신각 앞에서 벌인 노인동맹단의 시위는 이 같은 매국노의 망언을 통렬히 반박하는 쾌거였다.

이발과 정치윤이 돌아오자 노인동맹단은 6월 20일 환영회를 여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6월 25일에는 김치보 등 20명의 서명이 담긴 독립요구서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전달한 데 이어 강우규 의사를 서울로 파견해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을 기도했다.


적은 수의 비밀조직이나 단신으로 요인 암살, 식민통치기관 폭파 등을 감행하는 의열 투쟁에는 대부분 열혈 청년이 앞장섰다.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32)·전명운(24)을 시작으로 안중근(30), 김익상(26), 김상옥(33), 나석주(34), 조명하(23), 이봉창(31), 윤봉길(24) 등이 모두 20·30대 때 거사를 결행했다. 1924년 1월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도 1884년 7월생으로 만 40세를 넘지 않았다.

강우규는 64세의 나이로 총독 처단의 임무를 자원했다. 러시아인에게서 사들인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원산을 거쳐 서울로 잠입할 때도 별 의심을 받지 않았고,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러 오는 사이토를 향해 1919년 9월 2일 서울역(당시 명칭은 남대문역) 앞에서 폭탄을 던졌을 때도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다. 일본 경찰들은 백발노인이 범인일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난 강우규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해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08년 18세 연하인 이동휘를 만나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이 이뤄지자 큰아들 가족을 러시아 연해주로 먼저 보낸 뒤 이듬해 북간도로 옮겨갔다.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노인단과 민회를 조직해 구국계몽운동을 벌이다가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노인동맹단에 합류했다.

강우규가 던진 폭탄은 사이토 총독을 맞히지 못했다. 37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고 이 가운데 일본 경찰 한 명과 일본 신문기자 한 명이 각각 9월 11일과 11월 1일 사망했다. 의거 후 아무도 자신을 붙잡지 않자 강우규는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와 다시 폭탄 투척을 모의하던 중 목격자의 신고를 받은 일경의 탐문 수사로 9월 17일 종로구 누하동에서 체포됐다.

이듬해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일본 검사가 마지막 심경을 묻자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斷頭台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라는 한시를 남겼다. 의거 현장인 옛 서울역사 앞에는 2011년 9월 강우규의 동상이 세워졌다.


노인동맹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연해주 독립운동 기지를 불태우고 한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한 1920년 4월 참변 때 주요 간부들이 붙잡히거나 도피하며 해체됐다. 비록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20년 2월 한 청년은 서울역에서 연설하며 "강우규 어른은 연로하신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위해 희생되셨다. 독립을 위해 젊은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을쏘냐"라고 부르짖었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라는 강우규의 유언이 이뤄진 것이다.

정보화 사회와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들의 처지는 갈수록 곤궁해지고 있다. 세대 간의 갈등도 깊어져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대접받기는커녕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틀딱'이나 '노인충' 같은 험한 말도 떠돌고, 경로(敬老)가 아닌 혐로(嫌老)의 시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100년 전 노인동맹단의 활약상을 떠올리며 진정으로 존경받을 만한 노인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생각해본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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