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일본인 역사교사, "조부·부친이 보관, 평양서 배포된 독립선언서"
(천안=연합뉴스) 이은중 기자 =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내가 100년에 걸쳐 소중히 보관해온 독립선언서가 자료로서만이 아니고 3대에 걸친 사토 가(家)의 마음까지 받아줄 수 있는 곳이 한국의 독립기념관으로 생각돼 (이곳에) 기증하게 됐습니다"
일본인 사토 마사오(佐藤正夫·67) 씨는 28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밝은누리관에서 열린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양서 배포된 독립선언서 원본 기증식을 마치고 연 강연회에서 이같이 기증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마사오씨는 이날 조부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경위와 100년 동안 보관 과정, 그리고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게 된 사연 등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의 할아버지 사토 요시헤이(1879∼1954년) 씨는 1906년 평양 이문리 등에서 조선인들 속에서 그릇가게를 했다. 그 후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사토 도시오(1913∼2000년) 씨는 1919년 3·1운동 당시는 6살이었다. 평양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중학교를 거쳐 경성용산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독립선언서는 마사오씨의 조부가 평양에서 살면서 1919년 3월 1일 아침에 집 앞에서 습득한 것이다.
평양 숭덕학교 주변 등 당시 평양에서는 만세운동이 3곳에서 일어났다. 3곳 집회 장소의 중간에 할아버지 가게가 있었다. 집회참가자들이 가게 앞으로 지나갔을 것이고, 이들로부터 선언서를 전달받았을 것이라고 마사오씨는 추측했다.
조부는 조선인 거리에서 생활하고 그 속에서 어울려서 한국어로 그들과 이야기 하고 그들에게 동화돼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장사를 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그(독립선언서) 속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알고 있었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어디에 기증할지를 놓고 정말로 고민을 많이 했다"며 "성경의 마태복음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구절이 있는데, 물건은 원래 있던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독립선언서의 자료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조부와 부친의 평양, 조선에 대한 애정도 함께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도 했다.
한국을 생각하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오랜 관계 등 그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것같아 망설임이 컸다는 것이다.
역사교사였던 그는 독립선언서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그는 "아버지의 유품인 이 독립선언서를 5번 이사를 다니는 동안 훼손되지 않도록 이삿짐에 같이 쌓지 않고 맨 마지막에 승용차로 옮겼다"고 말했다.
마사오씨는 집안으로 들어서면 독립선언서가 제일 먼저 보이도록 복사해 걸어두기도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독립선언서를 대나무 상자에 접어서 고이 보관했고, 독립선언서의 훼손이 심해지면서 그의 아버지는 뒷면을 배접해 보관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한일간의 갈등이 하루아침에 극복되지는 않겠지만, 이 독립선언서를 통해 한국과 일본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기증식 인사말에서 "한국 국민에게 더없이 소중한 3·1 독립선언서를 100년 동안 보관해 주셔서 감사하다. 선생님이 기증하신 뜻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이 자료를 영구히 한국인의 유산으로 전승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토 마사오씨의 조부와 부친 부자 2대가 일제강점기에 비록 한국에 20여년간 살고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일본의 침략행위에 편승하지 않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시고자 한 노력이 한일 역사 화해의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그 정신을 잘 이어나가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사토 마사오씨가 기증한 이 독립선언서는 당시 평양에서 습득된 유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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