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국 교수 "김생, 9세기 초반까지 활동했을 가능성"
"서체로 보면 갈항사 명문, 신행선사비 탁본도 김생 작품"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홍관(洪灌)이 '그게 아니라 이는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다'라고 했으나, 두 사람은 웃으며 '천하에 왕우군(王右軍)을 빼놓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겠소'라고 하면서 홍관이 여러 번 말해도 끝내 믿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은 김생을 소개하면서 그가 쓴 글씨를 중국 북송 관리들이 왕우군 필체와 혼동했다고 했다. 왕우군은 중국 최고 서예가로 꼽히는 왕희지(王羲之) 별칭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문인들은 여러 문집에서 김생을 극찬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김생이 썼다는 글씨는 고려 광종 5년(954)에 승려 단목이 집자(集字)했다는 보물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만 전한다. 집자는 여러 금석문에서 글자를 모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이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 이영호 경북대 교수와 함께 김천 청암사 수도암 대적광전과 약광전 사이 앞 마당에 있는 비석에서 흐릿하게 남은 글자들을 판독해 김생이 비문을 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4일 발표했다.
서예사를 전공한 정현숙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수도암비 글씨에 대해 태자사비 필체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들어 김생 친필임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문구인 '김생서'(金生書), '원화삼년'(元和三年)이 드러난 것이다.
'원화'는 당나라 헌종(805∼820)이 즉위한 이듬해부터 사용한 연호로, 원화삼년은 808년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김생은 삼국사기를 근거로 711년에 출생했고, 사망 시점은 모른다고 알려졌다. 삼국사기에 따른다면 김생은 97세에 수도암비를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대해 박 관장은 삼국사기가 명시한 김생 생몰 연도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조사 과정에서 파악한 김생 서체를 바탕으로 김천 갈항사지 동탑 상층기단 명문(銘文·금석에 새긴 글)과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비를 김생 진적(眞蹟·실제 필적)으로 지목했다.
박 관장은 갈항사지 명문에 대해 "원성왕 재위 기간인 785∼798년에 새긴 것으로 알려졌고, 지역도 김천으로 수도암비와 같다"며 "한 줄에 해서(정자체)와 행서(정자체와 흘림체의 중간)가 같이 있고, 서체가 태자사비와 흡사하며, 품격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김생 글씨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단속사 신행선사비는 탁본만 현존하는데, 비석을 건립한 시기는 813년이다. 비문을 지은 이는 김헌정, 글씨를 쓴 사람은 영업(靈業)이라고 전한다.
박 관장은 "신행선사비 필적은 획이 굵고 가늘고 굽고 곧은 태세곡직(太細曲直)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는 김생 글씨 특징을 잘 보여준다"면서 "김생은 유독 불교 관련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많은데, 영업은 김생의 법명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행선사비 탁본은 비문이 많이 마멸되기 전에 떠서 김생 글씨의 절묘함을 잘 알 수 있다"며 "이제는 태자사비가 아닌 신행선사비로 김생 글씨를 연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관장은 아울러 801년에 세웠다는 경주 무장사비 글씨도 왕희지체 집자가 아니라 김생 진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도암비는 물고기 비늘 한 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며 "김생 글씨는 실로 광대무변한데, 9세기 초반 작품이라고 알려진 품격 있는 글씨를 쓴 사람이 김생일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방룡 원장은 "지금까지 학계에서 김생에 대해 말은 많이 하면서 사실은 실체를 잘 몰랐다"며 "수도암비가 김생이라는 존재를 부각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고 전망했다.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