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고 말했을 때 말렸더라면…"
"그냥 어쩔 수 없이 살 수밖에 없는 삶이 억울"
※편집자주 = '김용균법'이라고도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법의 시행일(2020년 1월 16일)이 200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해 12월 태안화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숨진 김용균(사망 당시 24세)씨와 2016년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 중 사고로 숨진 '구의역 김군'(사망 당시 19세) 등 비정규·하청 노동자들이 겪은 비극적 산업재해를 계기로 법이 개정됐으나, 이를 둘러싼 노동계와 경영계의 갈등과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김용균 씨의 죽음을 겪은 어머니 김미숙(51)씨와 동료 이준석(47)씨의 육성을 듣고, 시행 예정인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비판을 짚어 보는 세 편의 기사를 마련했습니다.
김용균이 엄마와 동료에게 남긴 숙제 / 연합뉴스 (Yonhapnews)
(서울·태안=연합뉴스) 탐사보도팀 오예진 기자 = 화력발전소에 비정규직 노동자로 취직한 아들은 입사 한 달 보름이 되던 날 집으로 와서 "힘들다"고 했다. 엄마 김미숙(51)씨가 마지막으로 본 아들의 모습이었다.
아들 김용균씨는 작년 12월 11일 오전 3시 20분께 충남 태안군 원북면 태안화력 9·10호기 석탄운송설비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낀 시신으로 발견됐다.
◇ IMF 때 나란히 실직한 노동자 부부
젊은 나이에 숨진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엄마와 아빠도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김미숙씨는 경북 구미에서 같은 공장에 다니던 남편과 1994년 결혼해 용균씨를 낳았다.
부부는 다니던 공장이 1997∼1998년 IMF 경제위기로 문을 닫자 남편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가서 고추 농사를 지었다.
그 때는 일이 고되었고 형편도 어려웠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엄마는 회고했다. 오히려 가만히 앉아서 '사람이 돈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정말 마음 맞는 사람하고 자식 키우면 그게 행복이지 않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가족은 구미로 이사했고, 엄마와 아빠는 전자 부품 공장에 취업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했다. 쉬는 시간도 아껴 가며 열심히 일했다. 엄마는 일하던 도중 회로 기판의 용량이 잘못 표기되는 것을 발견해 회사의 큰 손실을 막아서 직장에서 '일 잘 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사장이 엄마에게 직접 찾아와 감사 인사도 했다.
◇ 생계를 책임진 엄마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던 가족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아들이 고교 1학년일 때였다. 아빠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엄마는 병구완과 생계를 동시에 혼자서 책임져야 했다.
"애 아빠가 처음 쓰러졌을 때는 정말 죽다가 살아났거든요. 병원 의사가 (임종을) 준비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안 된다'고, '끝까지 해봐야 한다'고 하고 억지로 살렸어요"라고 엄마는 말했다.
하필 그 시기에 엄마가 다니던 회사도 경영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병구완에도 눈치가 보였다.
"처음에는 회사에 병간호 한다고 얘기할 수가 없었어요. 회사가 상태가 안 좋기 때문에 잘릴까봐… (집에) 아무도 없을 땐 정말 불안했는데 아휴……그때 생각하면 끔찍해요. (결국 회사에) 얘기해서 언제라도 전화를 받고 집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어요."
아빠는 쓰러지고 반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죽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됐다. 하지만 엄마는 한 달에 하루밖에 못 쉬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직장에선 잔업을 도맡으며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다.
◇ 경력 쌓아 한전 입사 노리던 아들
가족 모두에게 힘든 생활이었다. 그래도 아들은 고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아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공부 잘하면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못 따라오는 친구를 도와줄 수 있어 좋다"고 부모에게 말했다. 이른바 명문고에 다니는 건 아니었지만 아들이 반에서 1등, 어쩌다가 2등을 하는 게 엄마는 대견했다.
아들은 4년제 대학에도 합격했지만 취업을 해야겠다며 전문대에 진학했다. 군대에 갔고, 전기기능사 자격을 따고, 토익 공부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쉽사리 취업이 되지는 않았다. 계속 놀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취업해 경력을 쌓아서 한전에 입사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가 가게 된 곳이 태안이다. 그 곳 현장이 그렇게 험악하고 위험한지는 아들도 엄마도 아빠도 몰랐다.
◇ 아들 얘기를 못 나누는 엄마와 아빠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엄마와 아빠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 말을 아낀다. 아들 얘기가 나와서 서로 아픔을 줄까봐 두려운 거다.
엄마는 그래도 혼자 있을 때면 온갖 생각이 다 난다. 혹시나 이름을 달리 지었더라면 아들이 일찍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녹일 용'(鎔)에 '고를 균'(均)이라는 이름은 아들의 친할아버지가 '세상에 이름을 떨칠 이름', '다른 사람들을 널리 좋게 만드는 이름'이라고 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세상을 좋게 하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 죽어서 세상을 돕는다'는 뜻이었던가 싶어서 엄마는 가슴이 아프다.
"누구라도 태어나서 이름을 남기고, 좋은 일을 하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렇게 명이 짧아질 줄 몰랐죠. 아무리 세상이 좋아진다고 얘기를 해도, 그 때 느꼈더라면 저는 정말 (그 이름을) 안 썼을 거예요"라고 엄마는 말했다.
IMF 위기 직후 부부가 나란히 실직해 남편 고향인 영천으로 낙향했을 때, 고추 농사를 짓지 말고 처음 생각대로 소를 키웠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엄마는 해 본다.
소값이 떨어질 거라는 얘기를 듣고 소 키울 생각을 접었는데, 나중에 보니 송아지 값이 도리어 엄청나게 오르더라는 거다. 소를 키웠더라면 돈벌이가 괜찮았을테고, 그랬더라면 아들이 위험한 데 취직을 안 했어도 됐을까 싶다는 거다.
"정말 그 때 생각을 잘 했더라면 좋았을걸. 조금 더 돈벌이가 됐더라면 우리 용균이가 그렇게 험한 곳에 빨리 가려고 노력하지 않았어도 됐었고… 다 연관되죠. 다 그냥 저절로 생각이 연결돼요."
엄마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아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도 이제는 후회가 된다고 한다.
"월급은 그냥 주니까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최선을 다해서 당당하게 월급을 가져가야겠다 이런 생각이 항상 있었어요. 어떤 때에는 쉬는 시간도 마다하면서 저는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마음들이, 그런 것들이 우리 아들한테 어떤 영향을 줬나 (싶어요). 저는 우리 아들한테 제가 (직장에서) 열심히 해서 칭찬받은 이야기까지 다 해 줬거든요. 아이도 은연중에 받아들였을 거 아니야. 걔는 항상 엄마를 자랑스러워했어요."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태도가 아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아들이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지금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엄마는 해 본다.
◇ "그간 너무 많이 죽었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좌절과 분노가 들어왔다는 게 엄마의 느낌이다.
"이제는 자식이 없으니까 희망이 없잖아요. 희망이 없고 내가 뭣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잡고 삶의 끈을 이어가야 할지……. 사실 그렇거든요. 애가 죽어서 정말 저세상에 있다면, 만나는 게 확실하다면 지금이라도 정말 가고 싶어요."
엄마는 고통을 참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확실하지 않으니까 지금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냥 어쩔 수 없이 살수밖에 없는 삶, 그리고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던 것, 이게 억울한 거죠. 자식이 그렇게 가고 난 다음에 부모는 정말 먹고 자고 살고 있다는 자체가 다 힘들거든요. 그 자체가 죄인 같고…"
엄마는 "(아들이 마지막으로 집에 와서) 힘들다고 말했을 때 정말 말렸더라면 죽지 않았을 건데…"하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간 너무 많이 죽었어요. 아들도 그래서 죽었고요. 이걸 유가족이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바꾸겠어요? 우리 아들만 죽었다면 혼자 가슴속에 품고 살 거예요. 그렇지만 그간 너무 많이… 1년에 2천400명, 이건 엄청난 숫자잖아요."
엄마가 아들의 죽음 후에야 알게 됐다는 '1년에 2천400명'이라는 수치는 우리나라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의 수를 가리킨다. 고용노동부의 공식 통계를 기준으로 잡으면 작년 우리나라의 산업재해 사망자는 2천142명이었고, 이 중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가 971명, '산업재해 질병' 사망자가 1천171명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많이 죽어가는데 여태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어떻게 살아 왔을까… 어쩌면 나라가 일부러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게끔 정책을 펴지 않았나 싶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oh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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