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방사 월인석보 목판, 쌀 7∼8가마 값도 없어 소실"

입력 2019-06-12 10:00   수정 2019-06-17 15:53

"희방사 월인석보 목판, 쌀 7∼8가마 값도 없어 소실"
영주군수가 이전하려다 실패…1951년 1월 13일 불타
민영규 전 연세대 교수가 남긴 기록으로 확인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서적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친 중요한 초기 한글 자료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중에는 월인석보 서적이 12건 있는데, 목판은 보물 제582호 단 한 건만 존재한다고 알려졌다. 31건으로 구성된 목판은 선조 2년(1569) 충청도 한산에 거주한 백개만이 시주해 만들어 논산 쌍계사에 봉안했는데, 지금은 공주 갑사에 있다.
월인석보 목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경북 영주 희방사에도 있었다. 희방사는 선조 1년(1568)에 권1, 2를 다시 새겨 400년 가까이 보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희방사 월인석보 목판은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1월 13일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 월인석보 서적과 훈민정음 언해본 목판도 화마에 희생됐다.
12일 연세대에 따르면 연세대박물관이 7월 31일까지 여는 기획전 '서여 민영규의 1952년 10월, 전쟁피해 문화재 30일의 기록'에 나온 자료에는 희방사 화재의 전말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다.
민영규(1915∼2005) 전 연세대 교수는 1952년 10월 경상북도를 돌며 문화재 피해 상황을 조사하다 영주군수가 1950년 1월 20일 무렵 보낸 월인석보 판본 이관 경비 신청 관련 공문을 필사했다.
공문에 따르면 영주군수는 풍기면 일대에 소개령이 떨어지자 월인석보를 영주군청으로 이관하겠다면서 경비로 10만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희방사는 이듬해 1월 13일 오후 3시 미군에 의해서 건물 5동이 소실됐고, 각종 목판도 불길에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전시 자료 중에는 민영규가 1952년 당시 임병진 문교사회국장에게 "풍기 희방사가 어찌 되었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국장이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한 기록도 있다.
임 국장은 광흥사, 순흥면 숙수사지 당간지주 상태를 아느냐는 거듭된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변을 피하다 "가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영규는 조사를 마친 뒤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희방사 소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털어놨다.
그는 "영주군수가 보낸 공문은 물 위에 떠도는 부초처럼 경상북도청 내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다가 아무 효과도 내지 못했다"며 "희방사에 비장해 둔 월인석보 21권과 그 판목 222장, 훈민정음 판목 400여장, 예술적 가치가 풍부한 불상과 중요문화재가 거대한 사찰과 함께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이어 "그때 소개 비용 10만원이라고 하면 당시 시가로 백미 7∼8가마 값밖에 되지 않는 돈인데, 그 금액만 있었다면 능히 안전지대로 옮길 수 있었다"면서 경상북도 당국자와 문교사회국장을 비판했다.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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