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석교리 여래입상·봉화 오전리 여래좌상 등에 총격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희방사 일대에 여기저기 산재한 석불은 무지한 한국군 사병들의 사격 목표가 되어 한 몸에 수십 발의 탄환을 받아 길이 이촌(두 마디) 이상이나 되는 상처가 무수히 났다."
한국전쟁 정전 1년 전인 1952년 10월 경상북도 문화재 피해를 조사한 역사학자 민영규(1915∼2005)는 그해 11월 12일 동아일보 기자와 대담에서 이같이 말했다.
연세대박물관이 기획전 '서여 민영규의 1952년 10월, 전쟁피해 문화재 30일의 기록'을 통해 공개한 민영규 조사 노트를 보면 총탄 흔적이 있는 문화재는 한둘이 아니었다.
12일 연세대에 따르면 민영규는 보물 제116호인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을 1952년 10월 20일에 살펴본 뒤 "1950년 12월 10일경부터 1951년 1월 중순까지 국군이 주둔하면서 200m 거리 사격장에서 석불을 총격"이라고 적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봉화 오전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에 대해선 "3년전 물야지서 주임과 국군 10여 명이 총격한 흔적"이라고 썼다.
보물 제59호인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에는 국군 총격 흔적이 있고, 영주 부석면 석조여래좌상은 1950년 10월 국군 총격 작전 도중 불두가 사라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전쟁이 벌어지자 문화재를 사격 훈련용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민영규가 촬영한 사진은 60여년 사이에 문화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 영주 상망동 석불좌상은 불두가 바뀌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따르면 본래 불상이 있던 곳을 정확히 알 수는 없고, 불두는 1985년에 새로 만들어 붙였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28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현재 두 손이 없는데, 1952년 사진에도 손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조선고적도보'에는 불상에 손이 있어서 한국전쟁 전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윤현진 연세대박물관 학예사는 "민영규 선생이 남긴 사료는 기록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며 "언제나 역사는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을 알린다"고 말했다.
민영규는 당시 문화재 상황을 그림으로도 세밀하게 남겼다. 그는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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