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 노트 만들어 선수에게 나눠주고 자율 속의 규율 중시
선수들 "감독님을 위해 뛰어보자고 할 때도…못 잊을 감독님"
(우치[폴란드]=연합뉴스) 배진남 기자 = "운동장에서 '감독님을 위해 뛰어보자'고 할 때도 있어요." 새 역사를 쓴 한국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 미드필더 고재현(대구)의 말이다.
지도자에 대한 선수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느껴진다. 이름값이 아닌 확고한 지도철학과 실력으로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남자대회에서 준우승이라는 역대 우리나라 최고 성적을 낸 정정용(50) 감독의 리더십이 우리 사회에 울림을 주는 이유다.
정 감독은 우리 축구계의 비주류다. 청구중·고-경일대를 거쳐 1992년 실업 축구 이랜드 푸마의 창단 멤버로 참여해 6년 동안 센터백으로 뛴 그의 선수 시절을 기억하는 축구 팬은 드물다.
게다가 정 감독은 1997년 부상이 겹치면서 28세의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이후 그는 용인 태성중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고, 해외 연수 등을 통해 경험을 쌓았다. 그러고는 2006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로 활동했다.
고향 팀인 대구FC 수석 코치를 지냈던 2014년을 제외하고 그는 현재까지 12년 동안 14세 이하(U-14) 팀을 시작으로 연령대 대표팀을 지도하며 한국축구의 미래들을 키워왔다. 유소년 축구 시스템의 근간이 된 '골든 에이지' 프로그램도 그의 손에서 다듬어졌다. 대구 수석 코치 시절에도 구단의 U-18 팀인 현풍고 감독을 맡는 등 꿈나무 육성과는 인연을 놓지 않았다.
교수가 되고 싶어 했던 정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랜드에 있을 때도 팀의 허락을 받아 명지대 대학원에 다녔고, 훗날 지도자를 하면서는 한양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도 이수했다. 전공은 스포츠생리학이다.
정 감독은 유·청소년 선수들에게는 '지시가 아니라 이해를 시켜야 한다'는 지도 철학을 가졌다.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챔피언십에서 선수들에게 나눠줬던 '전술 노트'는 이러한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사례다. 이 노트에는 상대 전술과 경기 운영 방식에 따른 우리 팀의 포메이션, 세트피스, 측면에서의 콤비네이션 플레이 등의 내용이 담겼다.
선수들이 '마법의 노트'라고 할 정도로 특정 상황에서 필요한 움직임을 세세히 설명해 놓은 이 노트는 이번 대회에서 대표팀이 새 역사를 쓰는 씨앗이 됐다. 선수들은 당시 대회 기간 자료를 더 달라 먼저 요구하기도 하고, 시험공부 하듯이 전술 노트에 담긴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매 경기 다른 전략, 전술을 준비하고 포지션별 역할을 다르게 부여하며 상대에 따른 전술 변화를 과감하게 펼치는 데도 경험이 많지 않은 어린 선수들이 잘 녹아들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정 감독은 '자율 속의 규율'을 강조한다.
선수들에 따르면 정 감독은 대표팀 소집 기간 휴대전화 사용은 물론 선수들의 자유 시간을 존중해줬다. 가벼운 숙소 밖 외출은 오히려 권할 정도였다.
또한 선수와 지도자 간에도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하면서 선수들이 자신에게 먼저 편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선수들은 정 감독이 "착한 동네 아저씨 같다"고 한다.
대표팀이 에콰도르와의 4강전에서 1-0으로 이겨 사상 첫 결승 진출을 이룬 뒤 관중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선수들은 생수병을 들고 아버지뻘인 정 감독에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흠뻑 젖은 채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정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흥이 많다. 경기를 마친 뒤 자유롭게 표출한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 감독은 "이해가 바탕이 되고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으면 선수들은 운동장에서 신나게 다 드러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표팀 막내 이강인(발렌시아)은 이런 정 감독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못 잊을 감독님"이라고.
hosu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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