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1일 '50만 시위'에 두 달 만에 국가보안법 철회
정부 '송환법 철회' 아니라지만, 전 입법회 의장 "자연사" 점쳐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홍콩 정부가 100만 홍콩 시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의 연기 방침을 밝혔지만, 결국에는 2003년 국가보안법의 전철을 밟아 '자연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 2003년 퉁치화(董建華) 당시 홍콩 행정장관은 홍콩 헌법인 기본법 23조에 근거해 국가보안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홍콩 기본법 23조는 국가전복과 반란을 선동하거나 국가안전을 저해하는 위험인물 등에 대해 최장 30년 감옥형에 처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이와 관련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규정했다.
홍콩 의회인 입법회를 친중파가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퉁 전 장관은 국가보안법 제정을 자신했지만, 2003년 7월 1일 50만 명의 홍콩 시민이 도심으로 쏟아져나와 "국가보안법 반대"를 외치면서 사태는 급반전했다.
50만 시위에도 퉁 전 장관은 국가보안법 강행 의사를 밝혔지만, 홍콩 재야단체 연합인 '민간인권전선'이 7월 9일 입법회를 포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겠다고 위협하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퉁 전 장관은 예고된 입법회 포위 시위가 벌어지기 직전인 7월 7일 성명을 내고 "대중의 의견을 들어 법안을 재검토하겠다"며 국가보안법 2차 심의를 연기한다고 밝혔다.
이어 9월 5일에는 국가보안법 초안 자체를 철회했다.
이후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라는 중국 중앙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홍콩 정부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밀어붙인 송환법도 지금까지 상황을 봐서는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지난해 대만에서 임신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망친 살인범의 대만 인도를 위해 범죄인 인도 법안이 필요하다며 홍콩 정부는 지난 2월 법안을 발의했지만, 이후 야당과 시민단체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범죄인 인도 법안은 중국을 포함해 대만, 마카오 등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사안별로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범민주 진영은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이 법을 악용할 수 있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범죄인 인도'를 빌미 삼은 국가보안법의 재판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급기야 지난 9일에는 주최 측 추산 103만 명의 홍콩 시민이 역대 최대 규모의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어 12일에는 입법회를 둘러싸고 수만 명이 법안 2차 심의 저지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수십 명이 부상했다.
홍콩 정부는 12일 이후에도 송환법 추진 의사를 굽히지 않았지만, 경찰의 강경 진압 등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결국 캐리 람 장관이 전날 "법안 추진을 연기하고, 시민의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발표했다.
캐리 람 장관은 '법안 철회'는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홍콩 정치권에서는 사실상 '소멸'의 길을 걷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현 입법회 의원의 임기가 내년 7월 끝나기 때문에 이 기간 내에 법안이 재추진되지 않으면 법안은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캐리 람 장관이 "대중의 의견을 듣는 데 있어 시간표를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힌 만큼 정부가 무리하게 법안을 재추진할 경우 홍콩 시민의 더 큰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더구나 내년에는 입법회 선거가 예정돼 있으므로, 송환법을 섣불리 재추진했다가 분노한 시민들의 '심판'을 받을까 우려하는 친중파 의원들이 법안 추진에 소극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2003년 국가보안법 철회 후 벌어진 선거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표심'으로 심판하면서 국가보안법을 지지했던 친중파 진영은 쓰라린 패배를 맛봐야 했다.
전 홍콩 입법회 의장 앤드루 웡은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정부가 입법회 의원 임기인 내년 7월까지 법안 2차 심의를 재개하지 않는다면 법안은 '자연사'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ss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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