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박생광'이 넓힌 채색 한국화의 지평

입력 2019-06-17 17:24  

'그대로 박생광'이 넓힌 채색 한국화의 지평
민족적·무속적 성격의 채색화 선보인 작가, 대구미술관서 조명
회화·드로잉 162점 망라…15년 만의 대규모 회고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새빨간 옷을 입은 남자가 긴 원통을 든 채 먼 데를 바라본다. 초록색 구름이며, 발치의 청·록·황색 존재들이 이채롭다. 1985년 종이를 펴놓고 한창 작업 중이던 여든의 화가에게 아들이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다. "이 세상 잘 살고 간다. 피리 불며 즐겁게 길을 떠나는 노인을 그렸다."
화가 박생광(1904∼1985)의 아들 박정(74) 씨가 17일 전한 '노적도' 일화다.
후두암 투병 중이던 박생광은 '노적도'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현재 대구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노적도'는 유작이라는 사실을 넘어, 채색 한국화에서 첫손에 꼽히는 작가의 작업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박생광의 작품은 한 번 보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종이에 먹물이 번지게 한 뒤, 굵은 주황색 테두리를 그리고 청·록·적·황·흑을 주조로 채색한 작품들이다. 작가가 이렇게 하나같이 간단치 않은 색들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우리네 토속적인 풍경과 정서였다.



지난달 28일 대구미술관에서 개막한 박생광 회고전은 독창적인 채색 한국화를 만들어내기까지 화업 50여년을 훑어보는 전시다.
유작 '노적도'를 비롯해 회화와 드로잉 162점이 나왔다.
2전시장은 ▲ 민화에서 찾은 소재 ▲ 꽃과 여인, 민족성 ▲ 민족성의 연구 ▲ 무속성에서 민족성 찾기 4개 공간으로 구성됐다. '청담대사' '토함산 해돋이' '단군' '부처' 등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불교적인 이미지를 담은 1970∼1980년대 작업이 다수다.
3전시장에서는 1950년대∼1980년대 그린 풍경과 드로잉을 대거 만난다.
이번 전시는 일본 유학을 떠날 정도로 촉망받던 미술학도가 광복 후 왜색을 배척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은둔하다가 말년에 '그대로 박생광' 화풍을 꽃피우게 된 과정을 살펴보는 데 주력했다는 게 대구미술관 설명이다.
'그대로'는 일본에서 돌아온 작가가 사용한 아호로, 인생과 예술 모두 본연의 것을 체험하고자 하는 뜻이 담겼다.



아들 박씨는 17일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 기자간담회에서 1970년대 중후반 부친 작업이 탄력받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일본 전시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으신 아버지께서 '젊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작업을 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떠한 작업이냐고 여쭤보니, '우리 역사를 그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박생광은 재조명돼야 할 한국화가를 꼽을 때 여전히 우선순위에 드는 작가다.
이번 전시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04년 스페이스(Space)*C '색, 그대로 박생광' 전시 이후 박생광 화업을 제대로 소개하는 자리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뜻깊다.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그냥 전시를 보여주는 것과 잘 숙성해 보여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라면서 "하나하나 알토란처럼 볼거리가 많은 전시"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10월 20일까지.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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