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벤포라도 '언페어'…"인간 능력 의존 줄이고 기술·법의학 적용 확대해야"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눈가림'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일 때가 많지만, '정의의 여신'에 씌워진 눈가리개는 다르다.
대개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는 칼을 쥔 서구권 정의의 여신상은 두 눈을 가리고 있다. 빈부나 신분 등과 관계없이 모두를 공정하게 대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의의 여신은 어떤 선입견도 없이 공평한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애덤 벤포라도 미국 드렉셀대 법대 교수는 신간 '언페어'에서 오늘날 형사 사법제도의 불공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피의자의 직업, 외모, 재산 등 범죄 실체와 무관한 요소들에 따른 편견 속에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된다고 그는 지적한다.
인간은 누구나 편견과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저자는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도 의도치 않게 편견과 오류에 휘둘릴 수 있음을 인지심리 연구를 접목해 증명한다.
각종 사례를 통해 피해자, 피의자, 수사관, 검사, 판사 등 여러 사건 당사자들이 법 실행 과정에서 저지르는 오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오류는 사건 발생 초기 피해자 발견 순간부터 발생한다.
어느 겨울날 워싱턴 D.C. 거리에 쓰러진 채 한 남자가 발견됐다. 그는 목격자의 신고로 현장에 도착한 응급구조대원 앞에서 구토했다. 대원들은 술 냄새를 맡았다.
남자의 머리 부분에 피가 보였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동안 거의 의식이 없었다. 응급구조대원들은 취객이라며 남자를 병원에 넘겼고, 응급실에서는 제대로 남자를 진단하지 않고 술이 깨도록 내버려 뒀다.
알고 보니 남자는 취객이 아니라 강도들에게 파이프로 머리를 맞고 쓰러진 유명 언론인 데이비드 로젠바움이었다. 응급구조대원의 초진 이후 8시간이 더 지나서야 뇌수술을 받았지만, 그는 다음날 사망했다.
신원 파악조차 되지 않은 취객이 뉴욕타임스 출신 로젠바움으로 밝혀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추도식에는 거물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고, 당국은 비상 대응 체계를 대대적으로 점검했다. 현금 270달러와 신용카드를 훔친 범인 햄린과 조던은 각각 26년형, 65년형을 받았다.
뒤늦게 정의의 여신이 칼을 휘둘렀지만, 신원 미상의 취객이었던 당시 남자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 책의 저자 벤포라도 교수는 이러한 과정이 사법체계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문제는 정의의 여신이 스스로가 보지 못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순간에도, 알고 보면 그녀의 눈동자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단 정의의 여신이 머릿속에 해당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 이미지는 일하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이런 과정은 사법제도에서 끊임없이 목격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목격자나 형사가 범인을 식별하는 과정에서도 외모 등에 따른 편견이 작용해 진범이 아닌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배심원과 판사도 인종, 나이, 성별, 직업, 종교 등에 편견을 가지고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이 책은 미국의 재판 절차가 사회적 약자를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불공정을 해결할 개혁안을 제시한다.
재판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인간 능력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기술과 법의학 적용을 확대해야 하며, 근본적으로는 범죄 처벌에서 예방으로 사회자원을 옮겨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벤포라도 교수가 해부한 사법체계에 숨겨진 불평등은 미국만의 특수한 사례일까. 한국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익숙하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서구권 정의의 여신상과 모습이 좀 다르다.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지만, 다른 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대개 서 있는 서구 정의의 여신상과 달리 앉아 있다. 눈가리개 없이 눈을 뜨고 있다.
세종서적. 강혜정 옮김. 480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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