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아들, 신분 속여 21년 해외도피…5개국 공조에 덜미(종합)

입력 2019-06-23 16:26   수정 2019-06-24 11:58

정태수 아들, 신분 속여 21년 해외도피…5개국 공조에 덜미(종합)
다른 사람 이름으로 캐나다·미국 시민권…2017년부터 에콰도르 거주
에콰도르 당국, 출국 1시간 전 한국검찰 통보…57시간 걸려 국내 송환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회삿돈 32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수사를 받다 해외로 도주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아들 정한근 씨가 21년 동안 다른 사람의 신분을 이용해 캐나다와 미국, 에콰도르를 전전하며 도피행각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23일 대검찰청 국제협력단(단장 손영배)에 따르면 정씨는 1998년 검찰수사 도중 도주한 뒤 캐나다 시민권자 A(55)씨인 것처럼 속여 캐나다·미국의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한 뒤 2017년 7월부터 에콰도르에 거주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정씨는 1997년 11월 한보그룹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EAGC)가 보유한 루시아석유 주식 매각자금 322억원을 횡령해 스위스의 비밀 계좌로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그는 이 같은 혐의로 1998년 6월 서울중앙지검에서 한차례 조사를 받은 뒤 도주했다. 그해 7월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됐지만,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영장이 집행되지 못했다.
검찰은 정씨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가 임박하자 2008년 9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 국외 도피 및 횡령 혐의로 불구속기소 했다.
피의자가 해외로 도피한 경우 공소시효가 정지되지만, 정씨가 출국기록을 남기지 않고 해외로 밀항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효정지 제도를 적용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 기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씨의 소재를 추적하던 검찰은 2017년 정씨가 미국에 체류 중이라는 측근의 인터뷰가 방송된 일을 계기로 지난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정씨와 가족의 소재 추적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정씨의 가족이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 중인 사실을 파악했고, A씨가 정씨 가족의 캐나다 거주에 연루된 사실도 확인했다.
하지만 A씨가 캐나다에 간 사실이 없고, 2010년 국내에서 다른 이름으로 개명한 사실을 수상하게 여긴 검찰은 정씨가 A씨의 이름을 이용한 사실을 파악해 A씨 명의의 영주권과 시민권 관련 자료를 확보해 조사했다.
그 결과 정씨가 A씨의 이름으로 캐나다 영주권(2007년), 미국 영주권(2008년), 미국 시민권(2011년), 캐나다 시민권(2012년)을 각각 취득한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2011년에는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 A씨의 이름으로 대만계 미국인과 결혼한 사실도 파악됐다.




검찰은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 한국지부 등과 공조해 정씨가 2017년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에콰도르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고, 에콰도르 내 거주지까지 파악해 에콰도르 법원에 범죄인인도를 청구했다.
하지만 에콰도르 법원이 지난 4월 '범죄인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 검찰의 요청을 거부했고, 이에 검찰은 우회적 방안으로 에콰도르 내무부에 정씨를 강제로 추방해달라고 요청했다.
에콰도르 당국이 검찰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씨의 출국사실을 미리 알려주면서 정씨의 기나긴 도피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에콰도르 내무부는 지난 18일 정씨가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최종 목적지로 삼아 파나마로 출국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한국 검찰에 통보했다. 정씨가 탑승한 파나마행 비행기가 이륙하기 1시간 전이었다.
정씨의 출국사실을 통보받은 검찰은 미국 HSI 한국지부에 연락해 HSI 파나마지부를 통해 파나마 이민청에 정씨의 수배사실을 통보했다. 이를 토대로 파나마 이민청은 18일 파나마 공항에 도착한 정씨를 입국 거부한 뒤 공항 내 보호소에 구금했다.
정씨를 구금한 파나마 이민청은 곧바로 현지 한국대사관에 구금사실을 알렸고, 이를 전달받은 검찰은 법무부와 외교부, 경찰청 등과 협의해 정씨를 브라질과 두바이를 거쳐 국내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주파나마 한국 영사와 파나마 이민청 직원이 정씨와 동행해 7시간에 거쳐 파나마에서 브라질로 이동했다. 이후 주브라질 상파울루 한국 영사와 브라질 연방경찰이 브라질에서 두바이로 14시간에 걸쳐 정씨를 이송했다.
두바이에 호송팀을 급파한 검찰은 21일 오전 3시55분 두바이에 도착한 정씨를 넘겨받아 22일 오전 3시35분 국적기인 대한항공 편을 통해 국내로 송환했다. 파나마에서 한국까지 꼬박 57시간이 걸린 송환작전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긴밀한 공조하에 정씨를 파나마에서 브라질까지 7시간 비행, 브라질에서 두바이까지 14시간 비행하면서도 순조롭게 송환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씨를 송환한 검찰은 과거 발부된 구속영장을 곧바로 집행해 정씨를 구금한 뒤 관련 조사를 진행 중이다.
검찰은 정씨 조사를 통해서 해외로 도주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생사여부와 소재지 등도 파악 중이다. 정 전 회장은 횡령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확정받은 뒤 달아났다.
정 전 회장은 서울 대치동 은마상가 일부를 영동대 학생 숙소로 임대하는 허위 계약을 맺고 임대보증금 명목으로 72억원을 받아 횡령하는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6개월을 확정받았지만 2007년 도피한 뒤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는 1991년 12월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 사건에서 국회의원 등 정·관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뿌린 혐의(뇌물공여 등)로 구속기소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1995년 특별사면된 바 있다.
1997년 한보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2년 말 다시 특별사면돼 '사면 재수생'이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다.
검찰은 또 정한근씨에게 신분을 빌려준 A씨도 범인도피 혐의 등으로 조사했다.
96세 한보 정태수 행방 추적…"작년에 사망했다" / 연합뉴스 (Yonhapnews)
hyu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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