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멈추자 전선에서 노래…" 69년 만에 전해진 소년병의 편지

입력 2019-06-25 07:11   수정 2019-06-25 18:17

"총성 멈추자 전선에서 노래…" 69년 만에 전해진 소년병의 편지
영국 참전용사 폴 버크 씨, 부모에게 보낸 편지들
벙커 생활·추위로 인한 고통…부모 걱정할까 전우 사망 언급 안 해
중공군이 이간질을 위해 보낸 크리스마스 편지도 눈길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어머니 아버지, 저는 오전 7시쯤 배로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싫습니다."
한반도에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31일 영국 웰링턴 공작 연대 소속으로 18세에 참전해 부산 땅을 처음 밟은 폴 버크 씨가 전쟁의 불안감을 부모에게 이렇게 표현했다.
폴 버크 씨가 파병된 18개월 동안 한국 땅에서 부모에게 쓴 편지 5장을 비롯한 몇 가지 기록물이 59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합뉴스는 폴 버크 씨 아들로부터 그의 기록물을 건네받아 당시 영국군 소년병의 눈으로 본 전쟁의 단면을 전한다.

폴 버크 씨가 속한 웰링턴 연대는 부산에 도착한 이후 중공군과 전선이 형성된 임진강 일대로 나아간다.
폴 버크 씨는 당시 이동하며 본 전쟁의 풍경을 "빛도 나무의자도 없는 기차를 타고 24시간 이동하며 한국의 여러 마을을 지났습니다"면서 "수백명이 넘는 난민들이 판자와 넝마재질(coco-nut matting)로 만든 집에서 사는 믿을 수 없는 광경도 봤습니다"고 적고 있다.
웰링턴 연대는 1953년 '제2차 후크고지' 전투로 불리는 고왕산 전투에서 고지를 탈환하려는 중공군에 맞서 싸운 부대다.
버크씨는 편지에서 "우리는 언덕에 있는 수백개의 굴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6피트 정도 되는 사각형 공간에 2명의 병사가 작은 난로 하나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며 당시 생활을 적기도 했다.
전쟁의 고독함과 외로움 속에 굴속을 드나드는 쥐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그를 애완동물처럼 지켜봤다는 이야기도 담아냈다.

당시 영국군을 혹독하게 괴롭힌 것은 영하 40도 추위와 눈보라였다.
버크씨는 "스무겹의 옷을 껴입었다"면서 한국 추위를 '매섭다'(bitterly)라고도 표현했다.
편지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버크씨는 당시 추위로 총이 작동하지 않기도 했고, 금속 라디오에 피부가 달라붙기도 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웰링턴 연대는 전투로 15명이 숨지고 95명이 부상, 32명이 실종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버크씨는 편지에서 전우의 죽음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버크씨 아들은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애써 괜찮은 척했던 것이라고 들었다"면서 "아버님께서는 전우의 죽음으로 지금도 트라우마와 악몽에 시달리고 있지만, 가족에게 부담이 될까 이를 잘 표현하지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버크씨는 전쟁 중 폭탄 파편에 손가락을 다치고, 총 소음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됐지만, 자신의 부상 또한 편지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버크씨 부모는 영국군에서 보낸 알림 편지로 아들의 부상 소식을 뒤늦게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중에도 버크씨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크리스마스에 대한 내용을 문학적이면서 위트있게 표현했다.
캐나다 가수인 가이 롬바도의 '나는 엄마의 애플파이가 그립다'는 가사를 인용하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표하고, 형제들에게는 크리스마스를 잘 보내라고 당부하며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달빛이 비치는 후크 고지 위에서 전쟁의 참상을 잠시나마 가려버리는 흰 눈을 보며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버크씨가 가진 기록물 중에는 중공군이 영국군과 미국군을 이간질하기 위해 보낸 흥미로운 내용의 크리스마스 카드도 있었다.
발신인이 중공군·인민군으로 표기된 '평화가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라는 표지의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영국 군인들은 평화를 갈망하지만, 단 한명의 영국 군인도 없는 미군에 의해 운영되는 UN군이 협상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당신들에게 또 한차례의 우울한 겨울을 보내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영국의 치솟는 물가와 실업률 언급하면서 "친구여, 미군을 위해 더 싸우지 마라, 당신들이 없다면 그들(미군)은 전쟁을 유지할 수 없다'며 언급하는 대목도 나온다.
버크씨는 밤이면 천막과 숙소 등에 누군가가 이 편지를 여러 장 놓고 갔다고 평소 말했다.

기나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전이 선언되며 중단됐다.
버크씨는 이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위기도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오늘 아침 그들이 평화협정에 사인했다고 합니다. 두시간 동안 포격이 멈췄습니다. 아침 날씨도 무척이나 좋습니다. 전선이 3년 동안 전쟁 기간 중 가장 조용합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날 것이라고 다들 믿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후 10시 정전이 선포되자 전선은 환호로 가득 찼다고 적혀있다.
"전선에 있는 모두가 노래를 부르고 환호합니다. 중공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곳곳에 광명이 비춘 듯합니다"
"중공군이 하루 만에 강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식사를 위한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고 저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달 중순 6·25전쟁 69주년을 열흘가량 앞두고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처음으로 한국 땅을 찾은 폴 버크씨 아들은 "한국은 그들을 위해 희생한 참전용사를 기억하기 위한 활동을 잘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아버지의 사연을 듣고) 누군가 그들의 업적에 대해 칭송해 준다면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편지를 들고 왔다"고 말했다.
read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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