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대표들이 패전국 독일의 대표를 불러놓고 440개 조항으로 이뤄진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했다. 5년 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저격해 1차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바로 그날이었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아낸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48년 전 통일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바로 그 장소였다.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의 총성이 멎은 뒤 승전국들은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베르사유체제를 탄생시킨 파리평화(강화)회의의 시작이다. 평화를 내세우긴 했지만 사실은 독일의 배상금 액수를 정하고 패전국들의 영토를 나눠 갖기 위한 자리였다. 모두 27개국 대표가 참석했으나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3명이 좌중을 이끌었다. 동맹국 영국의 요청에 따라 참전을 선언하고도 유럽 전선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동아시아에서 영토 야욕만 채우던 일본의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도 당당히 참석해 목소리를 높였다.
베르사유조약을 비롯해 나머지 패전국과의 후속 조약이 마무리된 결과 유럽의 지도는 크게 바뀌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가 독립했다. 오스트리아는 영토의 73%와 인구의 75%를 잃어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헝가리도 영토의 3분의 2가 떨어져 나갔다.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역을 포함해 13%의 영토를 내주고 아시아에서도 중국 산둥반도 등을 일본에 빼앗겼다. 오스만튀르크제국은 중동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 등에 할양하며 이스탄불과 소아시아반도의 터키로 쪼그라들었다. 불가리아도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그리스 등 주변국에 땅을 나눠줘야 했다.
파리평화회의에는 전쟁 당사국이 아닌 나라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권을 빼앗긴 피식민국들도 대표를 파견해 식민국의 만행을 폭로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할 무대로 여겼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8년 1월 14개 조의 평화 원칙을 발표하며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해 11월 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클레인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해 "파리평화회의는 약소민족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연설한 것도 청신호였다.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 등을 중심으로 1918년 8월 발족한 신한청년당은 그해 12월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는 한편 1919년 2월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다.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난 김규식은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입양됐다가 구세학당(경신학교 전신)에서 신학문을 익히고 독립협회 활동을 거쳐 미국에 유학했다. 로어노크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프랑스어에도 능통해 파리평화회의 대표에 적임이었다.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한국대표관을 개설해 외교 활동에 나서는 한편 '자유한국'(La Coree Libre)을 간행해 3·1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알렸다. 4월 11일 임시정부 출범 후에는 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 대표위원으로 임명돼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의 서한을 클레망소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했다. 김규식은 한국대표관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이관용과 황기환을 부위원장과 서기장에 각각 임명했다. 친일 관료 이재곤의 셋째아들인 이관용은 스위스 취리히대에 유학하던 중 김규식의 제안을 받아 합류했고,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황기환은 미군으로 1차대전 유럽 전선에 투입됐다가 종전 후 동참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유럽 언론들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 파리위원부가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 관련 기사는 133종 423건에 이르렀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도 "사랑하는 한국 교회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누리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파리위원부에 보내왔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도 정한경·민찬호와 함께 파리평화회의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미국이 프랑스행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무산됐다. 김창숙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고자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파리장서)와 곽종석·김복한 등 유림 137명의 서명자 명단을 적은 종이를 꼬아 미투리로 만들어 신고 압록강을 건넜다. 파리로 향하려던 그는 상하이에서 임정 요인들과 상의한 끝에 김규식에게 영어 번역본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상하이에 남았다. 파리장서는 국내와 중국 등의 주요 기관에도 수천 부가 배포됐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는 파리평화회의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승전국의 일원인 일본 대표가 이를 허용할 리 만무했다. 12년 전 만국평화회의에서 분루를 삼킨 헤이그 특사들의 비운이 재현된 것이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호찌민도 베트남을 프랑스에서 독립시켜 달라고 청원했으나 열강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해 승전국들의 제 몫 챙기기를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말았다.
베르사유체제는 이듬해 국제연맹까지 탄생시키며 세계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듯 보였으나 그것은 피식민국을 제외한 '그들만의 리그'였다. 결국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괴물을 낳고 일본 군국주의의 발호를 막지 못한 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20년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나 파리평화회의는 애국지사들의 독립 의지를 고무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모멘텀이 됐고, 이를 통해 결집한 항일투쟁의 역량과 열망이 광복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역사적 사건임이 틀림없다. (한민족센터 고문)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