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향한 열망과 서독TV 전파 못막은 베를린장벽, 거대한 벽화판으로
독재청산재단·슈타지 박물관의 '피해자 중심주의'…"당신들이 틀리지 않았다"
[※편집자주: 연합뉴스는 6월 17일부터 27일까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관한 '평화 저널리즘'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해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독일 통일 관련 현장들을 둘러보았습니다. 30주년을 앞두고 있는 베를린 장벽 붕괴(1989년 11월9일)와, 그 도화선이 된 라이프치히 촛불시위의 현장을 견학하고, 관계자들과 면담한 내용을 토대로 6건의 기사를 출고합니다.]
(베를린=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세계 21개국 화가 100여명이 그린 거대한 벽화판으로 변해 있었다.
동서 베를린을 가르고, 서독 땅이던 서베를린을 포위했던 총 길이 약 160㎞의 장벽 중 슈프레강을 낀 1.3㎞ 구간에 벽화를 그려넣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는 독일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가 됐다.
동독과 소련 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입을 맞추는 모습을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이 장벽에 그려 넣어 널리 알려진 '형제의 키스'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 십수명이 줄 서 있었고, 무너진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을 담은 엽서는 3유로(약 3천900원)에 팔리고 있다.
야구장의 외야 펜스보다 약간 더 높아 보이는 높이 3.6m의 장벽은 냉전을 상징하는 '흉물'에서, 냉전 해체와 동서독 통일, 그리고 '힙(hip)한(세련되고 개성있는) 베를린'의 상징물로 변모했다.
자유를 찾아 벽을 넘으려다 총탄에 스러진 동독 젊은이들의 핏자국이 어딘가에 묻어있을 장벽에서 더이상 냉전의 상흔을 찾기 어려웠다.
2인1조로 시도해도 넘을 수 없는 높이(약 3.6m)로 지어졌다는 장벽은 사람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자유의 공기로 숨 쉬려는 동독인들의 열망을 막아내기엔 턱없이 낮아 보였다.
동독 젊은이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과, 그들에게 자유세계 소식을 전해준 서독 방송국의 전파가 수시로 장벽을 타 넘는 한 붕괴는 필연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서분단 시절 집권 사회주의통일당(SED) 출신 마지막 동독 총리였던 한스 모드로는 지난달 21일 한국기자들과 간담회에서 장벽까지 세운 동독 정부가 어째서 인민들의 서독 방송 청취를 철저히 금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금지시킬 수 없는 것을 금지하다가는 정권이 힘을 잃는다"고 답했다.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 왕래자들의 검문소 역할을 하며 1961년부터 1990년 통일전까지 연합군과 외국인, 외교관, 기자 등이 동서 베를린을 왕래하는 관문이었던 '체크 포인트 찰리는 기념사진의 배경이 됐다.
이곳에서는 관광객들이 미군 초병 군복을 입은 '가짜 병사'에게 3유로를 내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맥도날드, KFC는 미국의 승리로 끝났던 미소 냉전의 결과를 말해주는 듯했다.
뒤이어 찾아간 베를린의 심장 격인 국회의사당과 브란덴부르크 문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세계의 관광객들을 빨아 들이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서니 동서 분단의 원인 제공자인 히틀러를 추종하던 '돌격대원'들의 함성과 독일 통일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60년 세월을 뛰어넘어 긴박하게 교차하는 듯 했다.
통일을 이루고 29년이 지나면서 독일인들의 삶은 바뀌었지만, 아직까지도 독일은 동독 공산당 독재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청산재단은 동독 독재 관련 사법처리의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난 1998년 설립돼 동독 사회주의 독재의 기원과 발생원인, 역사, 영향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 자료 수집, 피해자 지원, 학술연구, 교육 등을 하고 있다.
재단 관계자의 명함에 새겨진 재단 로고는 정 중앙에 구멍이 뚫린 독일 국기 형상인데, 이는 재단의 지향점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독 국기와 달리 동독 국기엔 정중앙에 망치, 호밀, 컴퍼스 등 문양이 있었는데, 재단 로고는 그 문양을 펀칭기로 뚫어 없앤 형상이다. 통일을 했지만 동독의 독재역사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그리고 6월20일 방문한 동독 비밀경찰 조직 슈타지(국가보안부) 박물관에는 슈타지가 자국 인민들에게 행한 일들이 일체의 과장없이 그대로 전시·기록돼 있었다.
슈타지 본부내 장관 집무실이 있던 1호동을 그대로 사용해 만든 박물관이었다. 영화 '타인의 삶'에 묘사된 것과 같은 자국민 감시와 억압의 총본산인 이곳에는 불법 구금에 사용된 '감옥차(車)', 슈타지 장관 집무실 등이 옛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었고 슈타지의 비밀 정보원 역할을 한 서독 인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동독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였습니다."
슈타지 피해자인 자원봉사 해설가 토마스 루코 씨는 이렇게 말했다. 또 "오늘도 독일 의회에는 구 동독정권의 협력자들이 앉아있고 독재의 희생자들은 사회 밑바닥에 있다"고 개탄했다.
정규요원 8만5천명에 협조자 100만 이상의 슈타지는 동독 체제 유지의 첨병으로 자국민을 초법적으로 감시하고 구금했다.
통일로부터 근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독 독재에 대한 진상규명과 알리기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데 대해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연구교수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지적했다.
당시 동독에 적용된 실정법을 근거로 처벌했기에 기소율은 미미했지만 동독 집권자들에게 '당신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독재의 피해자 또는 저항자들에게 '당신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이 독재를 아직도 기록하고 교육하는 중요한 이유라는 것이다.
틸만 귄터 SED 독재청산재단 대변인은 "독재와 민주화는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며 "학생들에게도 스스로 질문하도록 전달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연수 과정의 하나로 취재·작성되었습니다≫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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