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학자·전문가 '통일전의 동서독 교류·협력 통한 신뢰축적' 소개
(베를린·라이프치히[독일 작센주]=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동독인들에게 '최후의 보호자가 누구냐'라는 문제에서 답은 동독이 아닌 '서독 정부'였습니다. 서독으로의 흡수통일은 동독인들이 결정했습니다."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연구교수는 지난달 21일 베를린 소재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구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을 비롯한 외부 상황과 동독 공산정권의 몰락 등 안팎의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독일 통일이지만 그 최종 결정은 동독인들이 내린 것임을 강조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후 이듬해 3월 동독 첫 자유선거인 인민의회 선거에서 조속한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기독교민주연합 중심의 '독일연맹'이 승리함으로써 1990년 10월 독일 통일이 이뤄진 것은 결국 동독인들이 선택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 만난 독일의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한국과 독일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며 독일 통일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동독인들이 서독과의 통일을 결정하기까지 동서독간의 꾸준한 교류가 있었음을 독일 전문가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동독인들이 서독으로의 흡수통일을 스스로 선택하기까지는 교류를 통한 상호 신뢰 축적과 동질감 확인의 과정이 있었던 셈이다.
독일 국적자로, 독일 통일에 대해 다년간 연구해온 김상국 교수는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1969∼74년 재임)의 동방정책을 통해 서독은 동독 인권이 조금씩 개선되는 것을 보았고, 동독은 서독의 현찰을 확보해 경제적으로 파산을 극복할 계기를 마련했다"며 "양쪽에서 긍정적 경험을 축적하면서 발전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도 한국과 독일의 상황이 다르다고 인정했다. "동독은 서독의 실질적 안보위협이 아니었기에 서독의 경우 통일 문제가 국내정치의 표를 좌우할 이슈가 아니었는데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며 동족상잔의 전쟁 경험이 있는 한국과 없는 독일의 환경은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과녁이 멀다고 해서 화살쏘기를 포기할 수야 있겠느냐"라면서 "서독 정부에서 통일정책을 밀고 가는 사람들에게 일관성이 있었고 그것이 결실을 보니까 여론도 지지세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박물관 위르겐 라이히 관장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전 '경계'를 무너뜨리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며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을 통해서 지자체, 교회, 스포츠 등에서 동서독간에 많은 접근과 교류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특히 동독 정권이 '나치 독일'이라 부른 서독의 수장인 브란트가 바르샤바 유대인 학살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일은 동독인들에게 긍정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전했다.
라이히 관장은 "또 하나의 요소는 가족"이라며 "이산가족이 있었고 우편으로 수백만개의 소포가 서독에서 동독으로 보내졌다"고 소개했다.
라이히 관장은 "서독의 커피와 카카오가 소포로 넘어왔는데 동독에서는 이것들이 귀한 품목이었다"며 "당시의 커피, 카카오의 동독 내 소비량중 20%가 서독에서 온 소포로 충당될 만큼 많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남북한이 언젠가는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세계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며 "독일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패했던 부분을 잘 고려해서 잘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연수 과정의 하나로 취재·작성되었습니다≫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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