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 지속하려면…"새는 곳간 막고 들어오는 돈줄 확대해야"

입력 2019-07-04 07:00   수정 2019-07-04 09:28

건보 지속하려면…"새는 곳간 막고 들어오는 돈줄 확대해야"
전문가들 '지출구조 합리화·국고지원 명확화·신규재원 다양화' 등 제안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우리나라는 1977년 7월 500인 이상 사업장에 직장 의료보험을 시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의료보험 시대를 열었다. 이후 점진적으로 대상을 확대해 나가면서 도입 12년만인 1989년 7월에 전 국민 건강보험을 달성했다. 세계 사회보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를 개척하면서 국민의 건강 수준도 끌어올렸다.
이달로 전 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은 지 30주년이 된다. 그렇다고 마냥 축하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산·고령화 속도에 경제 저성장 등으로 노인 의료비가 급증하고 보험료 납부자가 감소하는 등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건강보장 수준과 국민의 보험료 부담 정도, 의료서비스에 대한 요양급여 보상계획 등을 종합적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큰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건강보험법에 근거해서 지난 4월 내놓은 '제1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을 만드는데 실무 연구책임을 맡은 신현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정책연구실장의 진단이다.
이런 생각은 그뿐만이 아니라 보건의료 전문가 대부분이 공유하는 공통인식이다.
총인구 감소 시기가 빨라지고 초고령사회가 한 발짝 더 일찍 도래하는 등 인구구조 급변으로 건강보험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만큼,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게 제도적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문한다.
이들은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저성장과 고용 없는 성장 기조 아래서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진행되는 저출산 고령화는 건강보험 체제의 지속가능성을 급격하게 훼손할 것이라며 건강보험 제도 개혁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마디로 돈 낼 사람은 급격히 줄고, 건강보험 보장 혜택을 받을 사람은 크게 늘면서 보험재정 구조에 구멍이 뚫리는 상황에 대비해 건강보험의 중장기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국가적 플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존 의료제공 시스템의 낭비적 요소를 없애고 급증하는 의료비를 국가와 의료공급자가 책임지고 절감하게 하는 쪽으로 재정지출을 합리화하고, 근로소득 등 특정 재원에만 편중된 현재의 건강보험 재원을 다변화해 재정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 보험재정 나가는 지출구조 합리적 손질해야
우리나라는 민간 의료기관 중심의 의료서비스 공급체계 아래서 과잉 진료와 의료과다 이용, 비정상적인 진료비 청구 등으로 인한 재정 누수로 전체 의료비의 약 20% 정도가 낭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행 건강보험제도의 진료비 지급구조는 이른바 '행위별 수가제'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의료공급자가 의료행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수입이 늘어난다. 그렇다 보니, 의료공급자는 보험재정 증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를 줄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더 늘리려고 한다. 이 진료비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보다 훨씬 많이 의료를 이용한다. 'OECD 보건 통계 2018'을 보면, 2016년 기준으로 국민 1인당 외래진료 횟수는 한국이 연간 17.0회로 OECD 35개 회원국 중에서 가장 잦았다. OECD 평균은 7.4회였다
우리나라 환자 1인당 평균 병원 입원일수도 18.1일로, 일본(28.5일) 다음으로 길었다. OECD 평균(8.3일)보다는 연간 10일이나 더 오래 입원했다.
사무장병원과 면대 약국(면허대여 약국) 등 불법개설 요양기관이 과잉 진료를 하거나 진료비를 허위 부당 청구해 건강보험공단에서 빼내 간 금액도 엄청나 폐해가 심각하다.
건강보험공단의 '사무장병원 등 현황 및 문제점' 자료를 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부당하게 청구하다 적발된 사무장병원과 면대 약국 등 불법개설기관은 총 1천531곳에 달했다. 이 기간 환수 결정된 요양급여비용은 총 2조5천490억4천300만원에 달했다.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는 의료공급자에게 주는 건강보험급여의 총액을 미리 정하는 '총액예산제'로 진료비 지급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해진 한도에서 보험재정을 쓰게 해서 정부와 국회, 의료공급자가 어떻게든 스스로 알아서 진료비 부담을 줄이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또 주치의 제도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2, 3차 의료기관 간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영리추구의 무한경쟁을 벌이는 현행 민간중심 의료공급시스템 아래서는 불필요한 의료서비스와 진료비 증가가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 시행 등으로 지출증가는 너무 뻔한 일이라며 지출증가를 제어할 수 있게, 선진국들이 공통으로 채택하고 있는 의료이용량 총량 관리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불투명한 국고지원 규정 명확화하고 신규재원 조달 방안 다양화해야
사실 건강보험 재정창고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보험료를 더 많이 거둬들이면 된다. 하지만 이는 국민부담이 커지는 만큼 저항이 심하다.
보장확대는 바라지만, 비용은 부담하기 싫은 게 국민의 일반 정서이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미래 보건의료 정책 수요 분석 및 정책 반영 방안' 보고서를 보면, 2018년 만 19∼69세 성인 2천명을 조사해보니, 현재 62.7%인 건강보험 보장률을 73%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보면서도 건강보험료 추가 부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보장률이 높아지면 건강보험료 추가 부담은 불가피하지만, 부담 의사 조사에서는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는 찬성하지만, 보험료 추가 부담은 반대한다'는 응답이 전체의 57.1%로 가장 높았다.
보장성 강화에 찬성하면서도 보험료 인상에는 부정적인 게 여론인 만큼, 신규재원을 조달하려면 우회로를 택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우선으로 건강보험에 대한 현재의 불투명한 국고지원 법 규정부터 명확하게 고쳐서 재정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2007년부터 건강보험법과 건강증진법에 따라 '해당 연도 건강보험료 예상수입액의 20%'에 상당하는 금액을 14%는 일반회계(국고)에서, 6%는 담뱃세(담배부담금)로 조성한 건강증진기금에서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보험료 예상수입액을 적게 산정하는 편법으로 지금껏 이런 지원규정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
2007년부터 2019년까지 13년간 건강보험에 지급하지 않은 국고지원금은 13년간 21조6천억원에 달한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는 "현행법에 따르면 정부는 건강보험료 예상수입액의 20%에 상당하는 금액을 건강보험에 지원해야 하지만, 매년 법을 지키지 않고 지난해만 해도 2조3천억원을 덜 지원했다"며 "국고지원 부분을 개선해 책임을 명확히 해야 국민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영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등은 '건강보험 재정확충 다양화 및 사회적 합의 도출 연구' 보고서에서 '국고지원 규정을 전전년도 보험료 수입액의 15%는 일반회계에서, 3%는 담배에 부과하는 개별소비세에서, 2%는 건강증진기금에서 지원'하는 식으로 법조문을 명확하게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근로소득 이외에 여타 소득(금융소득, 양도소득, 임대소득 등)도 건보료 부과소득 범위에 포함하는 등 부과기반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보험료 이외에 목적세 등 다른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sh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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