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1920년 당시 일본군은 아시아 최강이자 세계 정상급 전력을 자랑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열강 대열에 진입한 데 이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당당한 승전국 지위를 얻어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1920년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최진동·홍범도·김좌진 등이 이끄는 대한민국 독립군 부대에 연패하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립군 승리의 요인으로는 부대들의 연합과 매복작전, 일본군의 자만심, 한인 동포 주민들의 지원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독립군이 구한말 의병 수준이었다면 승리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몇 달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체코군단이 쓰던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해 정규군 못지않은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봉오동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은 독립군 주력인 북로독군부 부대원들의 군복을 이렇게 기록했다. "병사들의 복장은 상하가 황색이고 모자 또한 같은 황색으로 태극 견장을 달았다. 예복에는 매화형 금장이 박힌 견장을 달고 헌병대는 오른쪽에 검은색 흉장을 달았다. 장교들은 모자와 견장에 금줄을 넣었다." 부대 편제와 장병들의 복식도 정규군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회영 형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 양성의 요람 구실을 하며 청산리 대첩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독립군의 무장과 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주역이 만주 최고의 거부로 꼽히던 최운산 장군이었다는 증언과 연구 결과가 몇 해 전부터 속속 나오고 있다.
최운산은 19세기 말 고종이 파견한 북간도 옌볜(延邊) 관리책임자(도태) 최우삼의 둘째 아들로 1885년 태어났다. 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함께 중국군에 입대했고 장쭤린(張作霖) 군벌에서 공을 세워 토지조사사업 때 엄청난 땅을 불하받았다. 성냥·비누·국수·콩기름 등 다양한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는가 하면 축산업과 무역업에도 수완을 발휘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1912년 최운산은 자위대를 구성했는데, 숫자가 점점 불어나 1915년에는 봉오동에 막사를 짓고 연병장을 닦아 부대원들을 훈련했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군무도독부란 이름의 독립군으로 재창설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병참을 책임지고 최진동과 최치흥은 각각 사령관과 참모를 맡았다. 이듬해에는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최운산은 1920년 5월 독립군 부대 통합의 산파역으로 나섰다. 북로군정서·대한국민회·군무도독부·대한신민단·광복단·의군부 6개 단체 대표는 봉오동에서 연석회의를 열었고,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을 합쳐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사령관 격인 부장(府長)에는 최진동이 추대됐고 안무가 부관(副官)이 됐다. 홍범도는 북로제1군사령부 부장(部長)에 임명됐다.
부대 운영과 전투에 필요한 무기, 식량, 피복 등의 보급은 모두 최운산의 몫이었다고 한다. 그는 땅을 팔아 요즘 가치로 따지면 150억 원에 이르는 5만 원의 군자금을 마련했다. 1차대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러시아 내전에 휘말린 체코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팔아 귀환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최운산의 자금력과 러시아 네트워크 덕분에 독립군이 이를 사들일 수 있었다.
1920년 들어 독립군들은 산발적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 그때마다 일본군은 추격전을 펼쳐 애꿎은 양민을 학살하는 일이 반복됐다. 1920년 6월 4일 새벽에도 박승길이 이끄는 신민단 부대 30여 명이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초소를 급습하자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삼둔자까지 들어와 양민들을 살육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북로독군부는 산기슭에 잠복해 있다가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봉오동 전투의 서전을 장식한 삼둔자 전투였다. 이번에는 함북 나남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이 6월 6일 밤 국경을 넘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왔다. 독립군은 유인작전과 매복작전을 적절히 구사하며 대승을 거뒀다. 임정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157명이 숨지고 300여 명이 부상한 반면 독립군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2명에 그쳤다.
청산리·대전자령 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북로독군부가 일본군 부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사기가 크게 올랐고 독립군 부대 연합에 대한 열망과 기대도 높아졌다. 이는 그해 10월 항일투쟁 사상 최대의 승전보로 꼽히는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봉오동에 독립군 진지를 구축하고 독립군 부대 통합을 끌어내 승리의 기틀을 만든 최운산의 공로는 100년 가까이 묻혀왔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최진동의 동생으로 군자금 5만 원을 지원하고 이들 3형제가 합심해 도독부 및 독군부를 조직했다"는 정도로만 간략히 기재돼 있다.
1945년 순국한 지 32년 만인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가 1990년 건국훈장 5등급에 해당하는 애족장으로 격상됐다. 최진동은 3등급인 독립장을 받았으나 최치흥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해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다가 국내로 귀환한 후손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 씨 등의 노력으로 2016년 7월 4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최용규)가 결성돼 회원들이 해마다 학술 세미나를 열고 봉오동 역사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지난달 14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개최된 제4회 세미나에서 이계형 국민대박물관 특임교수는 "국가보훈처가 2008년 최문무에게 애국장을 추서했으나 그는 최운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지적했으며,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쓰인 독립군 무기와 당시 각국의 무기 체계를 소개했다.
최 장군의 순국일인 7월 5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는 '대한군무도독부 창설 100주년 최운산 장군 순국 74주기 추도식'이 열린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추도식을 올리는 것은 올해가 두 번째다. 내년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는 해다. 그의 업적이 더 발굴되고 널리 알려져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처럼 최운산도 '만주 독립군의 대부'라는 명예로운 별칭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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