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 피로감이 '발목'…북마케도니아와 국호분쟁 타결도 '자충수'
난민 문제·1년 전 최악 산불 미흡 대처도 지지율 하락에 영향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2015년 1월 총선에서 국제채권단이 요구하는 긴축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그리스 역사상 첫 급진좌파 정부의 수장이자, 최연소 총리 자리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킨 알렉시스 치프라스(44) 총리가 집권 4년여 만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다.
치프라스 총리가 이끄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은 7일(현지시간) 실시된 그리스 총선 초반 개표 결과 중도우파 신민주당(신민당)에 완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4년 전 신민당을 야당으로 밀어내고 그리스 현대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집권한 급진좌파 정부도 기성 정당인 신민당에 다시 정권을 내주게 됐다.
치프라스 총리는 작년 8월 그리스의 구제금융 체제 종식을 이끌고, 국호 분쟁을 벌이던 이웃 북마케도니아와 역사적인 합의안을 도출하며 27년 만에 양국 갈등을 매듭지어 국제사회에서는 높이 평가받았으나, 국내에서는 돌아선 민심을 확인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이날 개표 중간 집계 결과 패배가 사실상 확정되자 "국민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도 "우리는 그리스를 (구제금융 체제를 벗어나)오늘 이 자리로 이끌어 오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고, 그로 인해 무거운 정치적인 대가를 치렀다"고 말했다.
그리스는 당초 오는 10월 총선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지난 5월 하순 진행된 유럽의회 선거에서 시리자가 예상보다 큰 격차로 패배하자 치프라스 총리는 예정보다 3개월 앞당겨 조기총선을 실시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그는 오랜 긴축에 시달리며 싸늘해진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최근 국제채권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각종 세금 인하와 저소득층을 위한 최저 월급 인상, 연금 인상 등 당근책을 제시했으나, 떠나간 민심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체 의석 300석의 과반에 약간 못 미치는 144석의 의석을 가진 집권 시리자는 이번 총선에서는 약 86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돼 의석이 크게 감소하는 부진을 보였다.
시리자의 이 같은 인기 하락은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 체제 아래 놓였던 지난 8년 간의 긴축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감 때문으로 풀이된다.
총 2천890억 유로(약 370조원)의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을 수령해 나라 살림을 꾸려 온 그리스는 구제금융을 받아 파산 위기를 넘기는 대신, 채권단의 요구에 따라 강도 높은 구조 개혁과 혹독한 긴축 정책을 이행해 왔다.
급여와 연금 삭감 조치가 거듭되면서 구제금융 체제 아래, 그리스 국민의 월급과 연금 수령액은 평균 3분의 1가량이 쪼그라들었고, 투자와 소비가 모두 위축되며 그리스 국가 경제규모는 이 기간 4분의 1가량 축소됐다.
치프라스 총리는 당초 국제채권단이 요구하는 긴축을 거부하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2015년 1월 총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추가 긴축안을 담은 국제채권단의 협상안 수용 여부를 놓고 2015년 7월 실시된 국민투표가 부결돼 막상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결국 파국을 막기 위해 채권단에 백기를 들고 더 혹독한 긴축 요구를 담은 3차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였다.
치프라스 총리는 3차 구제금융 수용 직후, 비등하는 국내 비판 여론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 그해 10월 초기 총선을 전격 소집하는 정치적인 승부수를 띄웠고, 구제금융 지속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판단한 국민의 지지를 업고 정권을 재창출했다.
하지만 그가 정권 초 자신의 공약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은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으로 이어졌다.
특히, 구제금융 위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40%까지 치솟은 청년 실업에 신음하던 젊은 세대가 느끼는 배신감은 컸다.
구제금융을 초래한 신민당 등 기성 정당에 거부감을 느끼며 4년 전 총선에서 시리자를 대거 지지했던 청년층은 이번 선거에서는 경제 성장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신민당에 표를 몰아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는 작년 8월에 8년에 걸친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 체제를 졸업한 뒤 최근 경제가 성장세로 돌아서고, 한때 28% 선까지 치솟은 실업률이 20% 아래로 하락하는 등 경제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구제금융의 그늘이 워낙 짙은 탓에 국민들이 경기 호전을 좀처럼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치프라스 총리가 지난 해 이웃 나라의 이름을 마케도니아에서 북마케도니아로 바꾸는 합의안에 조란 자에브 총리와 전격 서명한 것은 국제적으로는 환영받았으나, 그리스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국수주의자들과 보수파가 등을 돌리는 계기로 작용하면서 결국 '자충수'가 됐다는 분석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리스 국민의 3분의 2가 북마케도니아와의 국호 변경 합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밖에 치프라스 정부가 사모스, 레스보스 등 에게해 동부 섬 지역의 난민 초과 수용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방도를 찾지 못해 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된 것도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작년 7월 하순 아테네 근교 휴양지에서 발생해 101명의 목숨을 앗아간 역대 최악의 산불 역시 민심 이반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진화와 인명 구조 과정에서 당국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피해가 커졌다는 비판이 일며 정부가 궁지에 몰린 바 있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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