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16일부터 닷새간 부산과 창원서 학생·시민 동참
올해 국가기념일 지정 입법 예고…정부 주관 기념식 예정
[※ 편집자 주 =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선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이 올해로 40주년을 맞습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닷새간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회원구)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으로 시위 기간은 짧았지만, 군사정권 철권통치를 끝내는 계기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부마항쟁은 4·19, 5·18, 6·10 항쟁 등과 함께 4대 민주화 운동으로도 불립니다. 올해 행정안전부가 부마항쟁이 시작된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한 입법예고를 했습니다. 10월 16일 이전에 개정 절차가 완료되면 40주년을 맞는 올해부터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연합뉴스는 부마항쟁의 의미와 향후 과제 등을 3편에 걸쳐 송고합니다.]
(부산=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유신철폐 독재 타도", "민주주의 신새벽 여기서 시작하다."
부산대 교내 부마항쟁 발원지 표지석에 적힌 글이다.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부마항쟁(1979년 10월 16∼20일)은 박정희 유신독재 종지부를 찍고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를 오게 한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서슬 퍼런 유신체제는 불과 닷새간 이어진 이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부마항쟁 발단이자 배경은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불리는 비상조치 발표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헌법적 비상조치인 10월 유신 발표로 박정희 대통령은 종신집권과 제왕적 지위를 확보한다.
유신체제는 입법·사법·행정 3권을 전적으로 대통령 한명에게 집중 시켜 무소불위 통제와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문제는 국민 저항, 민주인사와 학생들 민주화 투쟁이었다.
유신체제 직전 학계와 언론계 심지어 사법부 등 각계 자율화 요구를 포함해 5·16 쿠데타 이후 이어진 치열한 반정부 시위는 큰 부담이자 종신집권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난제였다.
이런 민주화 운동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종신집권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게 긴급조치다. 긴급조치는 국가안보를 내세우는 계엄령과는 별도로 반정부 비판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긴급조치를 내세운 대규모 탄압은 수시로 이어졌다.
1973년 10월 2일 반유신 학내시위가 최초로 일어나 연행된 학생이 200명을 넘었다.
1974년부터는 민주화 운동에 나선 학생과 인사를 탄압하려는 긴급조치가 잇달아 발령됐다.
이중 긴급조치 4호는 '인민혁명을 기도한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을 적발했다'며 발령됐는데 이를 계기로 학생 등 1천24명이 체포돼 230명이 구속됐다.
230명 중에 군법회의에 회부된 이들에게는 징역 5년 이상에서 무기징역이나 사형이 선고됐고, 8명은 사형에 처했다.
긴급조치 9호는 1975년부터 5년간 지속했다. 이 기간 정부 발표에 따르면 구속자가 550명에 이르렀다.
유신체제는 1979년 들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1979년은 부마항쟁이 발생한 해다.
그해 5월 야당인 신민당 대표 경선에서 박정희에게 협조적이던 이철승이 패배하고 김영삼이 선출된다.
총재로 당선된 김영삼은 대정부 강경노선을 펼쳐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서 반유신 운동을 확장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YH무역 폐업으로 생존권을 박탈당한 노동자들은 야당 당사로 몰려와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박정희는 김영삼 총재 직무를 정지시켰고, 김영삼은 국회의원 신분까지 제명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 교내에서 학생들이 반유신 시위에 나서게 된다.
이날은 부마항쟁이 시작된 날로 기록됐다.
일회성으로 끝날 것 같았던 학생시위는 인근 대학과 인접 도시로 전파되면서 시민항쟁으로 확대됐다.
당시 당국은 이를 두고 '단순한 시위가 아닌 폭동에 가까운 소요이며 화염병과 각목을 사용하고 또 인명 살상이 가능한 사제총기를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부산대 교내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이 확대된 데는 학생 가두시위에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동참한 게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부산시는 물론 경남 마산시 거리와 시장에서 많은 시민이 시위대에 직접 합류해 투쟁에 나섰다.
급기야 어느 순간부터는 학생들이 아닌 시민들이 시위 투쟁을 주도해 나갔다.
유신체제 아래 철저하고 무자비한 탄압이 행해졌기 때문에 거리로 나서 반유신 의지를 표명하면서 행동에 나서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신의 생존을 개의치 않고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학생들이 시작한 반유신 시위에 일반 시민 동조하면서 함께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당국의 예상과 달리 일련의 사태 전개는 체재 존립 자체에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급기야 부마항쟁 대응책을 놓고 내부 갈등과 분란에 휩싸였다.
결국 박정희는 부마항쟁이 시작된 지 열흘 뒤인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지면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게 된다.
행정안전부는 부마항쟁이 시작된 날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려고 최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런 결정에 앞서 부산과 경남을 중심으로 2018년 출범한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범국민 추진위원회'는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행안부는 "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기념하고자 부마민주항쟁 최초 발생일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새로 지정하려는 것"이라고 개정 취지를 설명했다.
10월 16일 이전에 개정 절차가 완료되면 올해부터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처음으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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