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 개시일에 보복 단행…2년 전엔 北風·올해는 '한국 때리기'
한국 첨단산업 '정밀타격'…'협력→견제' 對한국 정책 기조 변화
ICJ 제소·경제보복 확대 등 압박 지속 전망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정권이 한국을 상대로 국제사회의 준거인 자유무역의 틀을 훼손하는 '무리수'를 둔 배경에는 오는 21일 열리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보수층을 결집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다만 아베 정권의 조치를 '선거용'으로 단정하는 것은 향후 일본의 움직임을 잘못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더 심층적이고 다각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전후 외교의 총결산'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아베 정권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를 억지로 떼어내고 양국 관계를 '협력'에서 '견제'로 재정립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압박, 주한 대사의 일시 귀국, 추가 수출규제 강화 등 전방위적 압박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 2년전 北風 이용했던 아베, 이번엔 '한국 때리기'로 보수층 결집
일본 정부는 참의원 선거의 후보등록과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4일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대한 경제적인 보복을 감행했다.
일본 정부는 선거용이기는커녕 보복조치도 아니라고 딴청을 피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보수 유권자들을 여당의 편에 묶어 두려는 '득표 전략'의 하나로 경제보복 카드를 꺼낸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자민당은 이번 선거의 후보자나 선거운동원 등에게 유권자들을 만날 때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를 언급하라는 조언을 지침으로 내놓으며 한국에 대한 보복을 선거에 활용할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마이니치신문도 보복 조치가 감행된 지난 4일 사설을 통해 "아베 정권이 보수층에 호소하려는 노림수를 갖고 있는 것 아니냐. 눈앞의 인기를 얻고 장기적인 국익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선거의 아베'라고 불릴 정도로 선거에 특히 강한 아베 총리가 나라 밖에 적(敵)을 만들어 유권자들의 표를 모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7년 중의원 선거에서 북한 핵·미사일 위기를 강조한 '북풍(北風)' 전략을 썼다. 당시 선거에서는 '희망의 당'의 돌풍이 거셌는데도, 아베 총리는 '북한 때리기'에 힘입어 낙승했다.
이번 선거의 판세가 일찌감치 여권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도 아베 총리가 '한국 때리기'를 선거 전략으로 활용하는 데에는 아베 총리와 자민당의 오랜 숙원인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데에는 그냥 승리가 아닌 압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들의 판세 분석에 따르면 자민당과 공명당 등 여권은 과반 의석을 무난히 확보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여권에 보수 야당인 '일본 유신의 회'와 개헌에 우호적인 무소속 의원들을 합한 개헌 세력이 개헌 발의선인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아베 정권의 보복 조치가 단지 선거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사실과 다른 데다 한국 정부가 향후 상황을 예측하고 대응 전략을 짜는 데 있어서 실책을 범하게 할 수 있어 위험하다는 지적도 많다.
한 외교소식통은 "아베 정권이 보복조치를 선거에 이용하려 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전부로 봐서는 안 된다"며 "아베 총리가 선거를 넘어 장기적인 포석을 갖고 한국을 압박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 "한국에도 'NO'를"…한일관계 '협력→견제' 기조 변화 움직임
일본의 보복 조치는 넓은 틀에서 보면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공격이나 참의원 선거 전략 이상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 기조 변화 움직임의 시작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이미 올해 들어 외교 청서나 총리의 연두 시정연설에서 한국에 대해 '이익을 공유하는 이웃'이라는 의미를 하나씩 지워왔다.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국가', '상호 신뢰' 등의 표현은 사라졌다.
이미 한일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던 상황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협력'이라는 기존의 정책 기조가 '견제'로 변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일본 정부가 역사 문제를 갖고 경제 보복을 실시한 것에서도 이런 전략의 변화가 감지된다.
지난 4일 단행한 경제 보복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한국이 우위에 있는 첨단 산업에 타격을 주는 동시에 글로벌 가치 사슬 속에서 한일 양국이 나란히 형성하고 있던 공급망을 깬다는 의미가 있다.
동시에 일본 정부는 근년 들어 중국 정부와는 급속도로 가까워지려 하고 있다. 한국과의 우방 관계를 흔들면서 중국에는 접근하는 식으로 이웃 나라들과 관계 재조정에 나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마이니치신문의 야마다 다카오 특별편집위원은 15일자 신문 기명 칼럼을 통해 "예전에 '미국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었다면 이번엔 '한국에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고 적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키우려 하지 않았던 일본이 강공을 펴고 있는 것은 관계를 다시 맺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 정부가 이번 규제 강화 조치에 앞서 수개월 전부터 한국에 대한 다양한 대응책을 찾아내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은 이런 정책 기조 변화를 대비해 일반의 예상보다 훨씬 긴 호흡의 '싸움'을 준비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베 정권은 '전후(戰後·일본의 2차대전 패전 이후) 외교의 총결산'이라는 이름으로 주변국과의 과거 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와의 평화협정 협상은 미진한 상황이며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도 요원하다. 중국과는 다소 가까워졌지만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열도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하다.
한국과도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가 뒤집어지며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아베 정권이 한국에 대한 정책 기조 변화를 통해 외교 성과로 과시할 가능성도 있다.
◇ 참의원 선거 승패 상관없이 '한국 압박 계속' 전망
아베 정권의 경제 보복이 단기적으로는 참의원 선거를 겨냥한 측면이 있는 만큼 일본 정부의 공세는 선거 후 일시적으로 완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하지만, 긴호흡으로 봤을 때 선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아베 정권은 개헌 추진과 정권의 구심력 확보를 위해 '한국 때리기' 카드를 유지할 전망이다.
아베 총리와 자민당은 평화헌법 조항인 헌법 9조(전력과 교전권 보유 금지)에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하는 내용의 개헌을 성사시킨 뒤 헌법 9조의 기존 조항을 고쳐 일본을 '전쟁가능국'으로 변신시키는 '2단계' 개헌을 달성하겠다는 큰 그림을 갖고 있다.
첫 번째 개헌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지지층인 보수층의 강한 지지가 필요하다. 이는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세력의 개헌안 발의선 확보 여부와 상관없이 반드시 챙겨야 할 '동력원'이다.
이에 따라 아베 정권은 추가적인 보복조치로 한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을 계속 사용하며 지지층을 끌어모을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아베 정권이 예상외로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2차 보복에 대해서는 한결 신중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일본 언론의 판세 분석대로라면 여권의 과반 의석 확보로 아베 총리가 '선거 승리'를 외칠 가능성이 더 크다.
아베 정권은 앞으로 '강제징용의 보복'이 아니라고 우기면서도 정면공격과 경제 제재를 통한 우회 공격을 번갈아 가며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면 공격으로 일본 정부는 한국이 중재위원회 설치 제안을 거부한 뒤 한국 정부를 ICJ에 제소할 계획을 갖고 있다.
주한 일본 대사를 일시 귀국 조치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며 만약 한국에서 일본 기업의 자산이 매각된다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대항 조치도 검토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관세 인상, 송금 규제, 한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 기준 강화 등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조치들 역시 징용 판결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것들이어서, 일본 정부는 이런 조치를 취할 경우 또다시 보복 조치가 아니라고 억지 주장을 펼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일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한국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첫 번째 보복 조치로 내놓은 바 있는 일본 정부는 두 번째 보복 조치로 안전보장상 우호국에게 수출관리 우대조치를 하는 '화이트(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려 하고 있다.
오는 24일까지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친 뒤 8월 중 관련 법 규정을 고쳐 시행할 계획을 갖고 있다.
다만 아베 정권이 실제로 이런 조치를 계속 취해 나갈지는 미지수다. 특히 경제 보복 조치를 놓고는 일본 내에서도 자국 기업들이 부메랑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큰 상황이다.
오쿠조노 히데키(奧園秀樹)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아베 정권이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강제징용 소송의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의 자산을 현금화하기 전에 한일 양국 정부가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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