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공간혁신' 우수학교 가보니…학생 토론 거쳐 결정
"현실 문제 직접 해결하는 경험…진로 설정·대입에도 도움 돼"
(광주=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예전에는 학교 끝나면 집에서 멍때리거나 스마트폰 보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제 학교에서 놀 수 있어서 좋아요. 학교가 '배틀그라운드' 같은 게임보다 더 재미있어요."
18일 광주 광산구 마지초등학교에서 만난 6학년 주경진(12) 군은 "학교에 창작 공간이 생기니까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기술도 배우게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학교 공간혁신' 우수사례로 소개받아 방문한 마지초등학교 외관은 평범하다 못해 다소 낡은 모습이었다. 동행한 교육부 관계자도 "2000년에 지은 학교치고는 낡아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내화로 갈아신고 한층 한층 올라갈 때마다 보통 학교에서 볼 수 없는 공간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2층 복도 한가운데에는 아이들이 앉아서 쉬거나 엎드려 책을 볼 수 있는 '도란도란 쉼터'가 있었다. 미끄럼틀 아래의 골방 벽 문을 열면 곧장 운동장으로 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한쪽 복도에는 탁구대들이 놓여 있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낙서해놓은 벽과 유리창들도 눈길을 끌었다.
마지초는 현재는 학교 공간혁신 우수사례로 전국에 알려져 있지만, 2년 전만 해도 복도나 야외에 학생들이 앉을 의자 한 개 없는 학교였다.
마지초 공간혁신을 주도한 김황 교사는 "아이들은 의자가 없는 밖에서 땅에 앉는 걸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불편이 익숙한' 모습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마지초 교사들은 '하지 말라'는 제약이 많았던 학교 공간을 아이들에게 '허용'해주는 것을 공간혁신의 첫걸음으로 삼았다.
뛰면 안 되는 공간이었던 복도를 뛸 수 있게 허용했고, 더 재미있게 뛰라며 나무로 카트를 만들어 타고 다닐 수 있게 했다.
한쪽 복도와 유리창에는 낙서를 허용했다. 아이들은 '넌 할 수 있어, 자신감을 가져, 잘 될 거야', '잘했어, 사랑해'라고 적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토론을 거쳐 어떻게 공간을 바꿀지 결정했다.
혁신의 출발은 철거였다. 학생들은 뻔한 공지사항이 적혀있던 게시판을 철거하고 그 자리를 학생 쉼터로 만들었다. 쉼터에 놓은 가구와 책상도 직접 디자인하고 조립했다.
가구 재료를 마련할 때는 인터넷이나 지역 상점 중 어디서 구입할 지를 토론했다. 학생들은 인터넷 상거래가 발달할수록 지역 상권이 어려워진다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비싼 재료만 인터넷으로 사고 나머지는 주변 가게에서 사기로 했다.
김 교사는 "기존의 교과서 기반 수업은 가상의 문제를 가상으로 해결했는데, 공간혁신 작업을 하자 아이들이 현실의 문제를 실제 해결하는 경험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직접 학교를 뜯어고치면서 '손으로 만드는 재미'에도 눈을 떴다. 공구와 재료를 가지고 무언가를 제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졌다. 학생들이 김 교사와 함께 마지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엉뚱 공작소'를 만든 계기다.
엉뚱 공작소에는 목공용 테이블이나 전기 드릴·톱 같은 웬만한 목공 도구는 물론 3D 프린터 같은 최신 기계까지 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 10여명이 순식간에 밥을 먹고 엉뚱 공작소를 메웠다. 아이들은 토시와 장갑을 끼고 각자 필요한 공구·재료를 챙겨서 저마다 무언가 만들었다. 머리띠나 냄비 받침처럼 실생활에 유용한 도구를 자주 만든다고 한다.
방과 후에도 많은 학생이 공작소에 들렀다. 자연스레 돌봄교실 기능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학생들은 와플이나 아이스티를 만들어 먹으면서 숙제를 하거나 컴퓨터로 코딩 연습을 했다.
한 학교에 훌륭한 공작소가 차려지자 인근의 다른 학교에서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지초에서 버스정류장 9개 거리인 광산중학교의 3학년 김보석(15) 군은 장기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직접 장기판·장기말을 만들고 싶었지만 광산중에는 목공 공간이 없었다.
지난 4월 마지초 엉뚱 공작소를 알게 된 김군은 이 곳을 찾아 김 교사 도움으로 한 달여 만에 장기판과 장기말을 만들었다.
김군은 마지초 복도에 탁구대가 놓여있는 모습을 보고 탁구채도 만들었고, 광산중 창고 구석에 있던 탁구대를 꺼내 친구들과 탁구를 즐기고 있다.
광산중 역시 학생들과 교사들이 공간혁신으로 학교에 생기를 불어넣은 사례 중 하나다.
학생회장 박세이(15) 양은 "최근에는 만화카페처럼 따뜻한 조명과 다락방·텐트 등이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면서 "일반 교실과 다른 공간에서 수업하면 아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공간혁신 활동에 참여하면서 진로를 찾거나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광주 첨단고를 졸업하고 신라대 실내건축디자인과에 진학한 오태범(19) 군은 "원래 건축가가 꿈이었는데, 공간혁신에 참여해보니 건물 자체보다는 그 내부를 디자인하는 게 더 적성에 맞길래 진로를 바꿨다"면서 "공간혁신 활동이 대입 자기소개서와 면접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첨단고 2학년 박채희(17) 양은 "중학교 때까지 꿈이 없었는데 이제 실내디자인 전공을 목표로 하게 됐다"면서 "생활기록부가 풍성해진 것도 좋지만, 우리가 낸 아이디어가 실제 결과물로 바뀌는 과정을 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며 웃었다.
교육부는 이처럼 낡았거나 방치된 학교 공간을 교사·학생이 직접 손으로 뜯어고치면서 그 과정에서 민주적으로 토론해 결정하는 경험을 하고, 일반 교실과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 색다른 교육에 활용하는 학교공간혁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처럼 교육청 지침에 따라 건축 전문가에게 리모델링을 맡기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며 민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용자 참여형 설계'가 핵심이다.
교육부는 '공간 혁신'이 학교시설 노후화와 학령인구 감소 문제를 극복하고 자기주도 학습 등 미래교육 체제를 준비할 핵심 열쇠라고 보고 예산과 전문 인력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 신청한 400개 학교에 900억원을 투입하며 향후 5년간 3조5천억원을 투입해 1천250여개 학교를 지원할 계획이다.
hy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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