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지난 주말 3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텍사스와 오하이오주 연쇄 총기 참사로 총기규제를 촉구하는 미국 내 여론이 고조하고 있는 가운데 의회의 총기규제 입법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위험인물의 총기류 소지를 선별적으로 규제하거나 총기거래자 신원 조회를 확대하는 법안들이 마련되고 있으며 총기규제 입법화의 최대 걸림돌이 돼왔던 전미총기협회(NRA)의 영향력이 전례 없이 약화했다는 판단도 의원들의 입법화 움직임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미국 내에서 충격적인 총기 사건이 빈발하는데도 불구하고 총기규제를 촉구하는 일반 여론은 번번이 NRA의 로비에 막혀 입법화에 실패했다.
남북전쟁 직후인 1871년 북군(北軍) 장성들의 주도로 결성돼 15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NRA는 그동안 총기 보급과 성능 향상 등을 추진하는 한편 총기 관련 입법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근래 다수의 국내 총기 참사로 비난 여론이 급증한 상황에서도 각계 유력인사들을 회원으로 보유하면서 건재를 과시해왔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랜트 장군을 비롯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등 9명의 역대 대통령도 NRA 회원이었다. 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NAR 회원이다. 이 밖에 다수의 역대 부통령과 대법관, 의원들도 회원이었다.
500만 회원을 주장하는 NRA는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후원해온 이익단체로 현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로는 총기규제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막상 규제법안에는 소극적 태도를 보여온 배경이다.
미-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등과 함께 워싱턴 정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3대 로비로 불리는 NRA가 그러나 근래 들어 그 영향력이 크게 줄고 있다는 판단이다.
잇따른 국내 총기참사로 총기에 대한 일반 여론이 악화하고 있는 데다 NRA 자체도 자리싸움으로 지도부가 1년 만에 교체되는 등 내분을 겪고 있다.
이란 콘트라 스캔들 주역이었던 올리버 노스 중령(예비역)이 지난해 NRA 회장에 선출됐으나 조직 내분으로 1년 만에 사임했다.
NRA는 또 지난 6월 자체 TV를 폐쇄하는 한편 홍보와 정계 로비 등을 담담 해온 핵심 인물들이 잇따라 사퇴했다. 지난주에는 3명의 이사회 멤버가 지도부에 대한 신뢰 상실을 이유로 사퇴하기도 했다.
NRA는 2016년 미 대선을 전후해 러시아 여성 마리아 부티나가 NRA와 접촉해 보수정치인 정보를 러시아에 넘긴 스파이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총기 거래자 신원조회 강화법안을 공동 발의한 피트 킹 하원의원(공화, 뉴욕)은 5일 더힐과의 인터뷰에서 "NRA가 예전처럼 강력하지 않다"면서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의회에서 총기규제법안을 추진한다면 NRA가 이를 저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밝혔다.
하원 국토 안보위원장을 지낸 킹 의원은 "NRA가 약화한 만큼 사람의 약점을 간파하는 거래의 달인인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줄리언 카스트로 전(前) 샌안토니오 시장도 "10년 전과 비교해 NRA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늘어났으며 미국 정계에 대한 NRA의 장악력이 많이 완화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NRA가 잇따른 스캔들로 크게 약화한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지원하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NRA의 반대에 막혀있던 총기 규제법안들이 통과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앤서니 스카라무치 전 백악관 공보국장은 CNN에 "NRA는 현재 기본적으로 벌거벗은 황제"라면서 "대통령이 공화당에 대한 영향력을 활용한다면 총기규제법들에 모종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NRA의 영향력이 실제로 그만큼 약화했는지에 대한 이론도 제기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해온 NRA에 맞서 규제법안을 추진할지도 미지수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총기규제에 대해 들쑥날쑥한 입장을 보여왔으며 지난 주말 총기참사에 대해서도 총기 자체보다는 정신질환과 증오가 문제라는 입장을 보였다.
NRA도 이에 총기 관련 폭력의 근원에 접근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처방을 환영한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인종차별과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총기규제에 대한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아야 할 순간이다.
yj378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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