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4년] ④ 한일 경제전쟁, 국내 핵심기술 독립 촉매제 되나

입력 2019-08-14 07:00  

[광복 74년] ④ 한일 경제전쟁, 국내 핵심기술 독립 촉매제 되나
日, 역사문제에 경제보복…'빠른 성장' 한국 주력산업 견제 의도도
위기를 기회로…정부·업계, 핵심 소재·부품 기술 국산화 총력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광복을 거쳐 1965년 일본과 수교를 맺은 이후 한일 교역은 54년 만에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일본이 지난달 1일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대(對) 한국 수출규제와 한국의 백색국가 제외를 천명하며 '도발'해온 이후 일본과의 관계는 '경제왜란', '탈(脫)일본' 등의 조어를 탄생시키며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배경에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주력 산업과 전기·수소차 등 미래 먹거리 산업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실제로 한국 주요 기업들은 일본의 규제 직후 긴급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한국 산업이 한단계 도약할 전환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대일 의존도를 낮추고 기술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정부와 업계,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광복후 70여년간 부침을 겪으며 꾸준히 성장해온 한국의 경제실력이 이제 일본에 마냥 밀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한몫 했다.
기업은 핵심 소재를 국산화하기 위한 기술개발에 나섰고, 정부 역시 소재·부품·장비산업의 국산화 제고와 국내 수요·공급 기업 간 긴밀한 협력을 지원하는 데 전방위적인 정책적 지원을 쏟기로 했다.

◇ 경제공격 단행한 일본…대일의존도 낮추기 '당면과제'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이 나오자 일본은 수출규제 조치를 단행하며 역사 문제를 경제적 보복으로 되받아쳤다.
일본은 지난달 4일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 핵심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했고, 지난달 7일에는 한국을 자국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공포했다.
일본은 대한국 수출규제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대지 않고 양국 간 신뢰가 현저히 훼손됐다고만 설명해 사실상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임을 드러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일 일본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안건이 가결되자 "일본 정부의 조치는 역사적·사법적 사안에 대해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보복을 가한 잘못된 조치"라고 꼬집었다.


일본의 행동은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수출에서 수량 제한을 할 수 없도록 한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을 위반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이 WTO 위반 가능성이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데는 경제적 보복과 함께 한국 산업의 빠른 성장세를 저지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여겨진다.
지난해 전 세계 전자업계에서 한국은 일본(4위)을 제치고 중국, 미국에 이어 3위 생산국 지위를 차지했다.
최근 5년간 주요국 가운데서는 베트남, 인도에 이어 3번째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일본은 오히려 -2.3% 역성장했다.
올해 다소 흔들리고 있긴 하지만, 삼성전자[005930]는 2017년과 2018년 반도체 매출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반도체업계의 최강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한국이 D램 등 전통적 반도체 부문에서 일본을 추월하고 시스템반도체 등 미래산업[025560] 분야에서도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등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이 아직 우위에 있는 소재·부품을 활용해 발목잡기에 나섰을 수 있다.
일본이 수출규제의 첫 타깃으로 삼은 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의 생산공정에 필수적인 소재이면서 대일 의존도가 높은 품목이다.
이들 품목의 대한국 수출이 지연되면 한국 반도체 생산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 3개 품목 외 추가 품목지정을 하지 않았지만, 한국이 일본의 백색국가에서 빠지는 오는 28일 이후에는 미래 먹거리 산업인 전기차나 수소차 소재를 겨냥해 탄소섬유 등의 수출을 막거나 지연할 수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일본 정부의 반도체 관련 중간재 수출 규제는 향후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며 "특히 비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IT 경쟁에서 한국이 앞서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적 규제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면 앞으로 다양한 수출 품목을 언제든 심사할 수 있도록 해 놓고 서류 미비 등을 이유로 수출을 금지할 수 있게 된다며 "언제든 한국을 칠 수 있는 '통상 무기'를 장착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전환점 맞은 한국 산업…업계·정부 협심해 '기술독립' 이룬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한국 산업의 취약점을 여실히 보여다.
한국 반도체는 글로벌 시장에서 왕좌를 차지하긴 했지만, 그 밑바탕이 되는 소재·부품·장비는 여전히 상당 부분 일본에 의존하는 구조를 탈피하지 못했다.
업계는 일단 러시아, 대만, 독일 등 대체 수입처를 발굴해 당장 생산에는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는 중이다.
하지만 외교적 상황에 따라 제2, 제3의 일본이 나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핵심 기술 국산화 등 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도 부심하고 있다.
삼성, SK 등 주요 기업은 자체적으로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동시에 국내 업체가 보유한 기술을 실제 생산에 활용할 수 있을지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5일 삼성 전자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일본의 수출규제와 관련해 "긴장은 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자"면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 한단계 더 도약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취지의 당부를 했다.
SK그룹 계열사 SK머티리얼즈[036490]는 에칭가스 개발을 본격화하기로 했다.
SK머티리얼즈는 삼불화질소를 생산할 때 불화수소를 원료로 사용하는데 기술적으로 국산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올해 말까지 샘플을 생산하기 위한 기술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는 세제, 예산, 금융, 제도, 입지 등을 아우르는 전방위 지원으로 기업의 기술개발 활동을 돕는다.
정부는 5일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통해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100대 핵심 전략품목을 1∼5년내 국내에서 공급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혁신형 연구개발(R&D) 지원,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인수·합병(M&A) 자금 지원, 수입 다변화 등 가용 가능한 정책 카드를 모두 동원하고 총 45조원에 이르는 예산·금융을 투입할 방침이다.
홍 부총리는 "디스플레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수요기업인 대기업의 적극적인 투자가 중요하다"며 "정부 역시 과감한 투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세제와 자금 지원 등을 통해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한국의 소재·부품·장비산업이 특정 국가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경쟁력을 기르는 기회로 활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년 전 IMF 외환위기 당시 가혹했던 고금리 긴축정책과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 노력이 결국은 '위장된 축복(disguised blessing)'으로 이후 한국 경제를 재도약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말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eu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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