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통관 절차 시행으로 EU産 비중 높은 식품·의약품 부족 대란 불가피
매일 3만명 출퇴근 아일랜드-북아일랜드 국경 상황은 '예측불허'
영란은행 "英 부동산 가격 브렉시트 이전보다 30% 하락할 수도"
4만명 넘는 英-EU 교환학생 지원 문제도 불투명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30대 런던 시민 마크는 수시로 아내 몰래 동네 '펍'(술집 겸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기름에 지져낸 베이컨과 소시지에 달걀 프라이가 어우러지고, 삶은 콩과 구운 토마토를 곁들인 '전통' 영국식 아침밥이다.
아내는 영국식 아침밥이 성인병을 일으킨다며 질색하지만, 마크는 바삭한 베이컨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영국이 아무런 합의 없이 유럽연합(EU)을 떠나는 '노 딜 브렉시트'가 벌어지면 서민들이 당분간 동네 펍에서 지금처럼 베이컨과 토마토가 넉넉하게 들어간 영국식 아침을 즐기기 어려울지 모른다.
현지 일간 더 타임스가 18일자에서 보도한 영국 국무조정실의 비밀문서에는 국경 통관 지연에 따른 물류 정체와 연료, 신선식품, 의약품 수급 우려 등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경우 예상되는 혼란이 구체적으로 적시됐다.
지난달 24일 취임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 시한(10월31일)을 지키기 위해 불사하겠다는 '노 딜'이 현실화하면 영국민은 물론 EU 주민에게도 엄청난 파장이 불가피하다고 현지 언론은 내다봤다.
◇ "최악의 경우 장바구니 물가 10%↑"…영국인 밥상 메뉴도 바뀐다 = 일반 시민들이 노 딜 브렉시트의 여파를 체감할 수 있는 분야로 우선 '식탁'이다.
영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영국 내 소비 식품의 28%는 EU에서 생산된 것이다. 약 3분의 1이 EU에서 온다는 통계도 있다.
전체 수입 식품에서 EU산(産)이 차지하는 비중은 79%나 된다.
사례로 제시된 영국인 마크가 좋아하는 베이컨은 영국내 수요가 생산을 훨씬 앞지르기 때문에 시중에 덴마크산이 다량 유통된다.
소비량이 많은 채소인 토마토는 5개 중 1개꼴로 EU에서 수입된 것이다.
노 딜 브렉시트로 영국과 EU 사이에 '물품의 자유로운 이동'이 중단되면, EU산 수입품도 관세를 물어야 하고 통관에 시간도 더 오래 걸린다.
가격 인상은 당연한 수순이며,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부 식품은 일시적으로 품귀 현상을 빚을 수 있다.
노 딜에 따른 파운드화 약세까지 겹치면 가격은 더 오를 수 있다.
동네 펍 주인은 영국식 아침밥 메뉴에서 가격이 오른 베이컨을 빼고 국내산 소시지를 더 주거나, 가격을 올려야 할 처지가 된다.
실제 수요·공급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비 심리로, 식품 부족 우려가 제기되면 사재기를 부추겨 가격이 치솟을 수 있다.
마크 카니 영란은행(BOE, 영국 중앙은행) 총재는 최악의 경우 장바구니 물가가 10%가량 치솟을 수 있다고 최근 전망했다.
◇ '메이드 인 EU 비중 75%' 의약품 상황은 더 심각 = 식품과 달리 대체재가 없는 의약품의 경우에는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영국에서 쓰이는 의약품의 약 75% EU 제품이거나 EU를 거쳐 수입된다. 의료기기는 거의 전적으로 EU를 통해 들어온다.
영국 정부는 노 딜 브렉시트에 따른 통관 지연으로 필수 의약품이나 의료기기 부족 사태가 빚어지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수입 화물이 도버항(港)이나 포크스톤항에서 통관을 제때 못하고 상당 기간 발이 묶일 수 있다.
올해 1월 왕립제약학회는 일선 약국이 혹시 있을지 모를 품귀에 대비해 진통제나 항우울제 같은 평범한 약을 확보하느라 애쓰고 있다고 전했다.
EU에 체류하는 영국인의 의료보장도 변할 수 있다.
지금까지 EU 각국에서 영국인에게 적용된 '유럽의료보험(EHIC) 혜택은 중단될 수 있다. 영국에 체류하는 EU 국적자도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없다.
영국 정부는 EU 각국과 의료보장 양자 합의를 추진할 방침이지만 결과를 담보 수 없고, 예고된 브렉시트까지는 석달도 남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탈퇴 협상 전망과 무관하게 EU 체류에 필요한 의료보험은 각자 알아서 준비하라고 조언한 바 있다.
◇ EU-英 입국심사 신설…아일랜드 국경 대혼란 우려 = 현재 영국을 포함해 EU 회원국 시민은 서로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든다.
작년에 EU를 방문한 영국인은 5천370만명으로, 나머지 지역 방문자 1천800만명의 네배 수준이다.
노 딜 브렉시트가 벌어지면 영국인이 EU 국가를 방문할 때 비(非) EU 시민과 같은 줄에 서서 입국심사를 받는다. EU 시민이 영국을 방문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또 90일 넘게 EU에 머무르거나 EU 지역에서 취업이나 유학을 하려면 각국의 규정에 따른 비자를 받아야 한다.
이는 EU와 영국이 양자가 적용될 새로운 규정을 마련하기까지 '사람의 이동'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특히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영국령인 북아일랜드 사이 국경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현재로선 예측조차 어렵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를 오가는 차량은 매달 트럭 약 18만대, 밴 약 21만대, 승용차 약 190만대에 이르며, 약 3만명이 매일 국경을 넘어 출·퇴근한다.
이 국경이 입국심사와 세관, 검역 등 국경 절차를 모두 수행하는 정식 국경, 즉 '하드 보더'로 운영된다면 엄청난 혼란과 불편이 필연적이다.
테리사 메이 전 총리와 EU는 마라톤 협상을 거쳐 하드 보더를 피하는 '안전장치'를 적용하기로 합의했었다.
영국을 한동안 EU 관세동맹에 잔류시킴으로써 급격한 변화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겠다는 것이 양측의 합의였다.
그러나 이 합의문은 영국 의회에서 3차례나 퇴짜를 맞았고 결국 메이 총리도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노 딜 브렉시트 상황이 되면 국경 통과 절차가 시행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수위 등 운영 방식은 안갯속이다.
영국 국영 BBC와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큰 변화가 없으리라며 짐짓 낙관적 태도를 보이지만, EU 고위 인사들은 'EU 단일시장' 보호를 위해 어떤 형태로든 심사·검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파스칼 도노회 아일랜드 재무장관은 지난 6일 런던 방문에서 노 딜 브렉시트에 대비한 국경 설치 계획에 관한 질문에 "EU 집행위원회와 협의하고 있다"고만 했을 뿐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더 타임스가 보도한 영국 정부의 비밀 문건 내용을 보면 영국 정부도 아일랜드 국경에서 하드 보더 시행에 따른 도로 점거 시위 등 대혼란을 우려하고 있다.
◇ 영국 부동산 가격 최대 30% 급락할수도 = 식품뿐만 아니라 EU로부터 수입하는 제품은 별도의 무역합의가 시행되기까지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부과되지 않던 관세가 붙기 때문이다.
노 딜 브렉시에 따라 파운드화가 급락하면 수입품 가격은 더욱 가파르게 오를 수 있다.
영국인이 EU를 방문할 경우 휴대전화 로밍 요금도 지금보다 더 내야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영국 부동산가격은 하락 전망이 우세하다.
이미 브렉시트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매수 심리가 위축돼 연간 부동산 가격 상승률이 여섯달 연속으로 1% 아래에 머물러 있다.
영란은행은 노 딜 브렉시트 경우에 부동산 가격이 브렉시트 이전에 견줘 30%까지 빠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 4만명 넘는 英-EU 교환학생 지원도 불투명 = 영국에 사는 EU 시민 370만명과, EU에 체류하는 영국인 130만명의 지위도 브렉시트와 함께 새로 규정돼야 한다.
양측은 현재 주민의 지위가 보장돼야 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노 딜 브렉시트 상황에서 10월말까지 행정 준비를 마치고 혼란 없이 시행될지는 불확실하다.
유럽의 교환학생 프로그램 역시 불확실성으로 학교와 학생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으로 EU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매년 1만6천명이 넘고, 영국 대학에 등록한 EU 출신 학생은 3만1천명 수준이다.
현재 교환학생은 계속 지원을 받는 데 문제가 없지만 노 딜 브렉시트가 벌어지면 신규 지원 절차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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