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단장 마친 佛 파리자유박물관…"나치에 저항한 역사 잊지말자"

입력 2019-09-03 06:01   수정 2019-09-03 08:34

새단장 마친 佛 파리자유박물관…"나치에 저항한 역사 잊지말자"
270억 들여 대대적 이전·통폐합 완료…레지스탕스 비밀벙커 있던 곳으로 옮겨
휴일 관람객들 '장사진'…나치 점령 겪은 프랑스 노년세대 눈시울 붉히기도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파리는 능멸당하고 불타고 박해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프랑스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로부터 수도 파리가 마침내 해방된 1944년 8월 25일, 자유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 장군이 파리 시청에서 한 이 연설은 프랑스인이라면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일 것이다.
파리 시민과 프랑스 국민, 나아가 전 세계에 프랑스의 해방을 선언한 드골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해방 75년이 지난 지금도 스피커를 통해 파리 자유박물관의 상설 전시실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자는 지난 1일(현지시간) 파리 14구 당페르-로슈로 광장에 있는 파리자유박물관을 찾아 둘러봤다.
파리 몽파르나스역의 한쪽에 다소 옹색하게 있던 장 물랭 박물관과 르클레르 기념관을 통합해 이곳으로 이전해 문을 연 자유박물관은 4년간 2천만 유로(270억원 상당)를 들여 대대적인 준비작업을 마치고 지난달 25일 다시 문을 열었다.
재개관일은 파리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프랑스인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지 정확히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파리시가 박물관의 새 입지로 이곳을 낙점한 것은 파리 수복 당시 레지스탕스 조직 FFI가 대대적인 봉기를 준비한 비밀사령부가 이 건물 지하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비밀 벙커도 박물관 관람객에게 사전 예약을 받고 개방되고 있다.
각급 학교의 개학을 하루 앞둔 휴일인 이날, 바캉스 기간의 마지막 주말을 의미 있게 보내려는 프랑스 시민들과 학생들로 박물관은 그야말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자유박물관의 공식 명칭은 '파리 자유박물관·르클레르 장군 박물관·장 물랭 박물관'이다.
2차대전 시기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점령되고 그에 맞서 싸운 영욕의 현대사를 자유프랑스군의 르클레르 장군과 레지스탕스(대독지하항전)의 리더 장 물랭의 인생 여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게 구성해놓았다.
기념관들을 합치면서 하나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기존의 이름들을 그대로 살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이름에 명시된 필리프 르클레르 장군과 장 물랭은 모두 프랑스의 2차대전 당시 대(對) 나치 항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들이다.
르클레르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자 영국으로 후퇴해 전선을 유지했던 자유프랑스군의 제2 기갑사단장이었다.
샤를 드골로부터 파리 수복의 특명을 받은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파리를 거치지 않고 동부전선 쪽으로 곧바로 진격하려는 미국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1944년 8월 파리로 진격, 수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르클레르는 프랑스를 벗어나 조국의 탈환을 위해 싸우면서도 프랑스에 남은 가족들이 나치의 박해를 당할 것을 우려해 본명인 '필리프 프랑수아 마리 오트클로크' 대신 '자크 필리프 르클레르'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지금도 그는 '르클레르 장군'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르클레르는 파리에 입성해 독일의 파리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의 항복을 받았고, 일본이 연합국과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도 자유프랑스의 대표로 현지에서 조인식에 참여한 프랑스 현대사의 중요 인물이다.
박물관의 또다른 핵심 인물 장 물랭은 '레지스탕스'(지하 대독항전) 통합을 달성한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독일이 프랑스로 진격할 당시 중부 외르에루아르의 도지사이던 그는 나치에 협력을 거부하다가 체포돼 고문을 받던 중 자살을 시도했다가 겨우 살아났다.
이후 런던으로 건너가 드골을 만난 물랭은 산발적인 레지스탕스 조직과 활동을 통합하라는 드골의 지령을 받고 다시 프랑스로 잠입, 우여곡절 끝에 다양한 계파의 레지스탕스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의 최고 수뇌였던 물랭은 게슈타포(나치의 비밀경찰)의 감시망을 피하지 못하고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1943년 베를린으로 이송 도중 생을 마감했다.
물랭을 죽을 때까지 고문했던 게슈타포 간부이자 '리옹의 도살자'로 불린 클라우스 바르비는 2차대전이 끝난 뒤 달아났다가 1983년 남미에서 붙잡혀 프랑스로 후송됐고, 법정에서 종신형을 받았다.
자유박물관에서 여전히 함께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은 르클레르와 물랭은 생전에는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르클레르는 파리를 탈환하고 독일의 항복 선언까지 받아내며 환희의 순간을 만끽했지만, 물랭은 해방이 되기 전 나치의 고문 끝에 산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장 물랭의 영광과 비극의 삶의 여정은 프랑스인들에게는 아픔의 역사 그 자체로 남아있다.
새 단장을 마친 박물관에서는 물랭의 도지사 시절 육성과 활동 모습이 담긴 영상, 그의 위조신분증, 르클레르 장군이 아프리카 전장에서 입었던 아랍식 외투 등 두 위인의 삶의 궤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각종 영상과 음성 자료, 그래픽을 통해 나치에 점령당하고 이에 저항한 흐름을 다채롭게 조망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그동안 2차대전과 나치에 대한 항거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오랜 공백 끝에 다시 문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프랑스 전역에는 리옹의 레지스탕스 박물관 등 2차대전과 대독항전에 관한 기념시설이 부지기수이지만, 파리에는 자유박물관이 오랜 기간 이전 재개관 준비에 들어간 탓에 나치 점령 당시 시민들의 삶과 해방의 감격적인 순간을 체험할만한 공간이 없었다.
쇼아기념관이 있기는 하지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쇼아·홀로코스트)에 초점을 맞춘 이곳은 2차대전과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자유박물관은 나치에 부역한 괴뢰정권이었던 비시(Vichy) 정부와 그 아래에서 저항 없이 나치의 잔혹한 전쟁범죄에 협력했던 치욕스러운 역사도 담담히 설명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곳곳에는 나치에 점령된 프랑스를 경험하고 파리 해방의 순간도 지켜본 노년 세대가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가족의 부축을 받거나 지팡이·휠체어에 의존한 프랑스 노인들은 영상에 나오는 파리의 시가지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 나치의 파리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콜티츠와 그 수하들의 자포자기한 모습, 드골이 파리로 입성해 샹젤리제 거리에서 열광하는 인파에 화답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감격에 겨운 듯 콧물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눈시울이 붉어진 관람객들도 여럿 있었다.
파리 근교에 거주한다는 로베르(84)씨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부인과 함께 박물관 곳곳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해방 당시를 기억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를 겪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너무 수치스러웠다"면서 "파리가 해방됐다는 드골의 연설을 들었을 때 우리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고 말했다.
재개관 전에는 모두 합쳐 관람객이 연 1만명 수준이었지만 새 단장을 마친 파리자유박물관은 연 5만명 이상의 관람객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와 한국은 2차대전 당시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의 수탈을 당하고 이에 저항했던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에 파리를 찾는 한국 여행자들도 시간을 내어 이곳을 방문해 볼 만하다. 상설전시관은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올해로 종전 75주년을 맞은 프랑스에서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피지배와 저항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곱씹으며 현재와 미래의 자양분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것이 뜻깊게 느껴졌다.
※파리자유박물관 웹 페이지 www.museeliberation-leclerc-moulin.paris.fr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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