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시민 76% "송환법 철회만으로는 부족"…5대 요구 모두 수용 촉구
시위대 폭력 반대하지만, "경찰 강경진압 조사해야" 목소리 더 커
오성홍기 불태우는 등 극단적 반중국 정서…'미·중 대리전' 양상도
건국절 이후 中 중앙정부, 유화책과 강경책 사이서 '결단' 가능성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지난 6월 9일 시작된 홍콩의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16일 100일째를 맞았다.
지난 2014년 79일 동안 도심을 점거한 채 민주화를 요구했던 '우산 혁명'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시위를 이어오고 있지만, 사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달 4일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함으로써 시위의 최초 원인은 제거된 셈이지만, 이후에도 홍콩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오고 있다. 과격화한 시위 양상을 보면 갈등은 되레 고조됐다고 할 수 있다.
홍콩 시위가 이처럼 장기화한 데는 홍콩 정부의 정치력 부재, 경찰의 강경 진압 파장, 중국 중앙정부의 강경론 고집 등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무역전쟁과 얽힌 미국과 중국의 대립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송환법 반대 시위는 지난 6월 9일 주최 측 추산 103만 명의 홍콩 시민이 모여 "송환법 철폐"를 외친 빅토리아 공원 집회를 시발점으로 본다. 이는 홍콩이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된 뒤 일어난 최대 규모 시위였다.
일주일 후인 16일에는 홍콩 정부가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한 데 분노해 주최 측 추산으로 무려 200만 명이 모인 시위가 벌어졌다.
예상 밖으로 거센 민심의 분노에 놀란 캐리 람 장관은 6월 15일 송환법 추진을 "보류한다"고 밝힌 데 이어 7월 9일 송환법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시위대는 송환법이 사망했다고 하면서도 법안의 공식적인 철회는 거부하는 캐리 람 장관의 태도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면서 5대 요구의 수용을 촉구했다.
홍콩 시위대의 5대 요구 사항은 ▲송환법 공식 철회 ▲경찰의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등이다.
하지만 정부가 시위대의 요구 수용을 거부하면서 홍콩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바뀌었다.
지난 7월 2일에는 일부 시위대가 홍콩 의회인 입법회 청사에 난입해 기물을 파손했고, 14일 사틴 지역에서 벌어진 시위에서는 경찰과 시위대의 격렬한 충돌로 시위 참여자, 경찰, 취재 기자 등 28명이 다쳤다.
지난달 12일부터 이틀 동안은 시위 참여 여성이 경찰의 빈백건(bean bag gun·알갱이가 든 주머니탄)에 맞아 실명 위기에 처하자 시위대가 홍콩국제공항을 점거했고, 1천 편에 가까운 여객기가 결항하는 '항공대란'이 벌어졌다.
극심한 충돌에 대한 비난 목소리가 커지자 지난달 18일 170만 명이 참여한 송환법 반대 시위가 평화롭게 끝나는 등 평화시위 기조가 정착하는 듯싶었지만, 불과 열흘 만에 시위대와 경찰의 격렬한 충돌은 재연됐다.
이달 2일부터는 총파업(罷工), 동맹휴학(罷課), 철시(罷市) 등 '3파(罷) 투쟁'이 전개돼 홍콩의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노동계마저 송환법 반대 투쟁에 동참했다. 동맹휴학에 참가한 학생들만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사태가 격화하자 캐리 람 행정장관은 지난 4일 송환법 공식 철회와 함께 각계각층과의 대화, 경찰민원처리위원회(IPCC)에 의한 경찰 진압 과정 조사, 홍콩 사회 문제의 뿌리 깊은 원인 조사 등 4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홍콩 시위의 주역 조슈아 웡(黃之鋒)이 표현한 것처럼 캐리 람 장관의 발표에 대해서는 "너무 부족하고 너무 늦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만약 한두 달 전에 발표됐다면 시위 사태를 누그러뜨리는 데 효과를 발휘했겠지만, 1천 명을 훌쩍 넘는 시위 참여자가 체포되고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중상을 입은 시민이 속출한 상황에서 이는 너무 늦고 부족하다는 얘기다.
홍콩 명보가 최근 시민 623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는 홍콩 시민들의 이러한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사 결과 캐리 람 장관이 내놓은 4가지 대책이 충분하다는 응답자는 18.8%에 불과했으며, 충분하지 않다는 응답자가 무려 75.7%에 달했다.
홍콩 정부가 수용하지 않은 나머지 4대 요구사항 중 이것만은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묻는 말에는 70.8%가 '경찰의 강경 진압을 조사할 독립위원회 구성'을 꼽았다. 이는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한 27.0%보다 훨씬 높았다.
이는 송환법 반대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쌓여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난달 31일 경찰이 프린스에드워드 전철역에 최정예 특수부대 '랩터스'를 투입해 시위대 63명을 한꺼번에 체포한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경찰은 지하철 객차 안까지 들어가 시위대에 곤봉을 마구 휘두르고 최루액을 발사했으며 그 결과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은 시위대 7명을 병원으로 이송해 치료를 받게 했다고 밝혔지만, 시민들은 경찰의 무차별 구타로 3명이 숨졌다고 믿는다. 정부가 6차례나 기자회견을 열어 시위대 사망을 부인했지만, 별 효과는 없다.
홍콩 현지 기업을 운영하는 신 모 대표는 "직원들과 얘기하다가 시위대 사망설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며 "홍콩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명보 조사 결과 시위대의 폭력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39.4%였지만, 경찰의 폭력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그 두 배에 가까운 71.7%에 달했다.
입법회 야당 의원인 클라우디아 모(毛孟靜)는 "경찰이 폭력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이는 법 위에 군림하는 것과 같다"며 "경찰 과잉진압을 조사하지 않는다면 정부의 다른 모든 조치는 헛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 시위의 전개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반중국 정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7월 21일에는 일부 시위대가 중앙정부 홍콩 주재 연락사무실 앞까지 가서 중국 국가 휘장에 검은 페인트를 뿌리고 날계란을 던지는 등 강한 반중국 정서를 드러냈다.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바다에 버리거나 불에 태우는 일도 수차례 벌어졌다.
반중국 정서가 표출되는 것에 반비례해 친미 정서는 갈수록 커져 지난 8일 시위에서는 수백 개의 성조기가 등장해 홍콩 시내를 휩쓸고 다녔다. 15일 시위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염원한다는 플래카드까지 등장했다.
이는 홍콩 시위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 양상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의 무역협상에서 원하는 바를 관철하고자 하는 미국은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을 내세워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이 법안은 미국이 매년 홍콩의 자치 수준을 평가해 홍콩의 특별지위 지속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고, 홍콩의 기본적 자유를 억압한 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미국 비자 발급을 금지하고 자산을 동결하는 내용을 담았다.
중국의 무력개입 협박에 강하게 반발하는 홍콩 시민들은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을 내세우는 미국에 갈수록 호감을 느끼는 분위기이다.
반대로 중국 공산당의 권위와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는 중앙정부는 홍콩 시위 배후에 외세의 개입이 있다는 주장을 거듭하면서 홍콩 정부에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홍콩 경찰이 강경 진압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캐리 람 장관이 이에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경찰의 행동을 옹호하는 발언만을 되풀이하는 것에는 중국 중앙정부의 이러한 주문이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홍콩 정부가 시위의 과격화, 장기화에 대응할 뾰족한 묘수를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칼자루는 중국 중앙정부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최대의 정치 행사인 10월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을 앞두고 중국 중앙정부는 현재 운신의 폭이 좁은 상황이지만, 건국절이 지난 후에는 모종의 결단을 취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만약 유화책을 내놓는다면 경찰의 강경 진압 조사 등 시위대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것이 되겠지만, 인민해방군 무장경찰의 무력개입이나 홍콩 정부의 '긴급법'이나 '공안조례' 발동 등 강경책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긴급법은 비상상황 시 홍콩 행정장관에게 시위 금지 등 비상대권을 부여하며, 공안조례는 계엄령 발동 권한을 부여한다.
다만 이 경우 국제사회가 비난을 쏟아내면서 무역협상 등에 악영향을 미치고, 격분한 홍콩 젊은이들의 극단적 폭력 시위를 초래할 수 있어 그 가능성을 섣불리 점치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주홍콩 한국 총영사관 관계자는 "10월 1일 건국절 행사를 치르고 난 후에는 중국 중앙정부의 운신 폭이 넓어질 수 있다"며 "유화책이든 강경책이든 모종의 대책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ss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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