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부호들, 도쿄 도심 고급 맨션 '싹쓸이'

입력 2019-09-20 14:02  

아시아 부호들, 도쿄 도심 고급 맨션 '싹쓸이'
호가 수십억원에도 '보지도 않고 즉석 구매'
최근엔 세컨드 하우스나 '과시용'으로 구입, 일본인은 엄두 못내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 "도쿄(東京) 도심의 맨션은 정작 일본인도 살 엄두를 낼 수 없다. 내년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도쿄 도심의 고급 맨션 가격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이런 한탄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NHK가 19일 보도했다. 대만과 홍콩을 포함한 중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의 부호들에 더해 조세피난처(tax haven) 자금이 고급 맨션을 마구 사들여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기 때문이다.
19일 발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도쿄 도내는 모든 지역의 지가가 올랐다. 7년 연속 상승이다. 도심 지가 상승은 올림픽을 앞두고 전매차익을 노린 중국인들의 '폭풍 구매'가 주요 요인이라는게 정설이다. 하지만 외국인의 구매실태는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중국인 등 외국인들은 지상 20층 이상의 타워맨션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NHK가 지난 5년간 준공된 도쿄도 내의 타워맨션 85개동 소유자 등기부를 떼어 조사한 결과 작년 4-5월을 기준으로 외국인 개인과 기업의 소유가 최소한 1천816채인 것으로 파악됐다.
외국인 소유가구가 많은 상위 10개동 가운데 4동은 도쿄 도심인 주오(中央), 미나토(港), 신주쿠(新宿), 도시마(豊島)구 등 4개구에 몰려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유주의 국적은 대만이 664채로 가장 많고 홍콩을 포함한 중국이 590채, 싱가포르가 367채였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이른바 '조세피난처'의 법인도 42채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사람이 6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외국인 소유자가 가장 많은 신주쿠 니시신주쿠(西新宿) 소재 타워맨션은 한 채 가격이 최고 3억5천만 엔(약 38억7천만 원)인데도 외국인과 외국 법인이 202채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4채 중 1채가 외국인 소유인 셈이다. 외국인의 '싹쓸이', '폭풍 구매'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케 한다.
외국인 소유자가 증가한 배경으로는 엔화 약세에 더해 동일본대지진의 영향으로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자 개발업자들이 해외판로 개척에 나선 영향도 큰 것으로 분석됐다. 홍콩과 대만 등지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해 일본 부동산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외국인 투자가를 고객으로 두고 있는 복수의 부동산회사에 따르면 이런 '폭풍 구매'는 3-4년전이 피크였다. 한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당시엔 "도쿄 중심부에 이렇게 싼 물건이 있느냐"며 물건을 보지도 않고 사는 외국인이 줄을 이었다고 전했다. 특히 대만인 부호들은 "2억 엔이든 3억 엔이든 덮어놓고 사겠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런 투자자금이 몰리면서 도심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다 보니 어느새 일본의 보통 서민들은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른바 '폭풍 구매'와는 다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가격이 크게 오르는 바람에 외국인 투자가의 눈에도 비싸다는 인식이 확산해 전매목적으로 물건을 아예 보지도 않고 사는 사람이 요즘은 없어졌다는게 다른 부동산 관계자의 전언이다. 중국 당국이 본토에서 해외로 송금할 수 있는 금액을 제한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대신 투자목적이 아니라 '세컨드 하우스'나 '별장'으로 구입하는 "진짜 부유층'의 구매가 두드러지고 있다.
"2016년까지는 고객의 80%가 투자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절반 정도로 줄고 대신 세컨드 하우스 구입이 절반 정도로 늘었다". 대만에 본사를 두고 있는 부동산 회사 담당자의 말이다. 세컨드 하우스라고 해도 여러가지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하나는 출장이나 여행 때 소유자가 직접 사용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유학중인 자녀의 주거용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용도는 친구나 친척이 일본을 여행할 때 '자랑할 목적'으로 자기 소유의 맨션에 묵게 하는 경우다. 대만은 부유층의 네트워크가 강해 이런 게 화제가 된다. 요즘은 일본에서 1억 엔을 넘는 물건을 사는 부유층은 투자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이용하거나 자랑용인 경우가 많다"는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런 상황을 현지 일본 부동산 업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타워맨션 거주자들은 집을 비싸게 내놓고는 팔리지 않아도 괜찮다며 값을 깎아주지 않고 버텨 거래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업자들은 "그렇게 비싸게 살 사람이 있겠느냐"며 냉소적이지만 어느 날 외국인이 덜컥 사버리는 바람에 그 값이 시세가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tax haven'이 아니라 'safe haven'이라는 말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외국계 부동산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초부유층이 위험회피 수단으로 국내에 있는 자산을 선진국 부동산으로 옮기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가 안정되고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도쿄는 이들에게 말 그대로 '안전한 천국'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lhy5018@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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