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냉전 상황서 서독 정부의 유연한 對동독·소련정책 '기억 저편에'
독일 언론서 한일갈등에 대한 입장 갈려…힘겨운 공공외교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일본 의회 내 개헌 추진기관인 헌법심사회 소속 의원들이 최근 독일 수도 베를린을 다녀간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독일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 법무상을 지낸 모리 에이스케와 신도 요시타카 등 중의원 헌법심사회 의원들이 베를린을 찾았다.
며칠 전까지 중의원 헌법심사회장이었던 모리 의원과 신도 의원은 여당인 자민당 소속으로 일본 최대 극우단체인 일본회의의 주요 회원이다.
신도 의원은 '일본 영토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의원연맹' 회장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며 억지를 부려온 인물이다.
이들은 독일 정치권 인사 등을 만나 평화헌법에 자위대의 존재 명기 조항을 추가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의 필요성 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방문은 최근 일본의 경제도발로 한일관계가 고조되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최근 노골적으로 개헌을 위한 행보를 벌이는 가운데 이뤄져 눈길을 끈다.
일본 측은 독일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로비를 펼쳐왔다.
모리 의원은 2017년 독일의 정론지인 주간 차이트와 인터뷰를 하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들며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최근 독일 언론에서도 한일 간의 갈등이 부각되는 가운데, 일본 의원들이 독일 측 인사들에게 일본 측의 논리를 펼쳤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일본이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 3국 동맹이었던 독일을 우군으로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일본과 같은 패전국인 독일은 과거사 문제에서 끊임없는 반성과 경제적 보상 노력을 보이며 일본과는 대조적인 행보를 보였다.
더구나 독일은 한국전쟁 이후 동서냉전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승전국들과 주변국들의 동의 아래 재무장을 한 바 있다.
유럽의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은 유럽연합(EU)에서 입김이 강하기도 하다.
일본이 독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물밑 작업을 꾸준히 해온 이유다.
◇ 한반도·한일관계에서 '아쉬운' 독일의 시각
한국 입장에서도 독일은 유럽외교의 주요 교두보일 수밖에 없다. 분단의 역사를 극복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레퍼런스다.
역대 대통령들은 어김없이 독일을 찾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독일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베를린 구상'을 내놓았다.
남북관계에서 외교의 주요 열쇠는 북미 간의 협상이지만, 교착 상태인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유럽국가의 작은 지원도 절실한 시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일본과의 갈등 국면에서 독일의 과거사 반성 노력 등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이 한반도 분단상황과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서 한국 측의 입장을 그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오산이다.
최근 한국과 독일 간의 관계증진을 위해 베를린에서 열린 한독포럼에서도 아직 독일을 이해시키는 데 갈 길이 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포럼 이틀째인 지난 20일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장인 이은정 교수가 질의에서 "독일은 북한 정권을 악마 대하듯 하고 있는데, 분단 시절 서독의 수반들은 동독 당국과 대화를 통해 접근을 통한 변화를 이뤄냈다"면서 한반도 문제에서 독일의 유연한 접근을 요청했다.
포럼에서 한독 양국의 독재 경험을 주제로 강연한 한명숙 전 총리는 "독일이 남북을 보는 시각 자체가 어둡고 부정적으로 우리의 기대와 어긋난다"라며 "전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 상황을 극복할 힘을 독일이 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이에 슈테판 아우어 주한 독일대사는 "북한을 옛 동독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는데, 북한은 핵보유국이라는 점"이라며 "북한은 세계 질서를 위반했고, (제재 참여는)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서독 분단 시절인 1970년대 말 동독에도 핵이 있었다.
소련이 위성국인 동독에 중거리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동서 진영 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됐을 당시, 서독 정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와 보조를 맞추면서도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는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등 긴장 완화를 위한 중재자로서 노력했다.
슈미트 총리는 모스크바올림픽 불참을 선언한 미국을 상대로 보이콧 철회를 요청하기도 했다.
서독의 이런 유연한 외교를 통해 당시 동서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서도 동서독은 교류·협력을 이어가고, 미국과 소련도 협상 테이블로 나오는 데 일조했다.
과거 서독 정부가 동서독 평화와 교류를 위해 펼쳤던 유연한 외교사는 현시점에서 독일 당국엔 잊힌 과거사가 된 셈이다.
◇ 한일 간의 치열한 외교전…힘겨운 싸움
한일 간의 갈등 국면은 독일 언론에서 관심사가 되고 있다. 관련 내용을 다룬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런데, 일본 측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논조의 기사들이 눈에 띄고 있다.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이 지난달 9일 자 1면에 한일 간의 갈등 상황에 대해 사실상 한국 측 책임을 지적하는 기사를 실었다.
최근에는 일간 디벨트에서 일본 전문가인 독일인 칼럼니스트가 '한일 사이에서의 유럽의 중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은 이미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일본 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반영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해선 한국의 반도체 제품이 북한으로 수출될 수 있다는 일본 측의 주장을 그대로 실었다.
일본 측의 경제도발이 시작된 지난 7월에는 디벨트에 뜬금없이 '동해'와 '일본해' 표기 문제에서 일본 측 편을 든 전직 독일 국방장관의 기고문이 실려 그 배경에 의문을 자아내기도 했다.
과거 독일과 일본은 동맹 관계를 통해 인적, 물적 교류를 오랫동안 해왔고, 독일 사회에도 아시아권 문화 중 일본 문화가 상당히 뿌리 깊다.
일본 정치권도 독일 주류 사회에 상당히 공을 들여왔다. 한일 관계에서 일본을 옹호하는 기사가 느닷없이 나오고 일본 측 주장이 반영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물론 주요 정론지 중 하나인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여러 차례 과거사 반성 및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는 등 일본 측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들도 나온다.
최근에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에서 일본 측의 입장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의 하네스 모슬러 교수의 기고문이 게재됐다.
독일 마부르크대 정치학 박사 출신인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도 지난해에만 10여 차례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한반도 문제에서 독일 측의 협력을 요청했다. 정치인 출신답게 현지 정치인들과의 교류 폭도 넓다.
이은정 교수 등 독일 대학의 한국학 연구자들은 학계 등에서 공공외교의 최전선에 서 있다.
현지 한국 관련 시민단체인 코리아페어반트(Korea Verband)를 중심으로 유학생들과 파독 간호사 출신 교민 등이 소녀상 관련 전시 및 시위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독일 내 소녀상 전시에 대한 일본 측의 철거 압박 사실이 독일 언론에 실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부인인 김소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경제개발공사 한국대표도 공공외교 무대에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측이 오랜 기간 다져놓은 기반과 경쟁하기는 여전히 버거운 현실이라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국 측 한 인사는 "정치인 등 한국의 주요 인사들이 독일을 찾을 때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에서 기념사진 촬영하는 데 주안점을 두지 말고, 실질적인 공공외교를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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