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서 십자가 떼어내야" 교육장관 발언에 가톨릭계 거센 반발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문화적 포용이냐, 전통 고수냐'
바티칸 교황청을 품은 가톨릭 국가 이탈리아에서 '종교 논쟁'이 불붙었다.
이는 로렌초 피오라몬티 교육부장관의 '십자가' 발언으로 촉발됐다.
1일(현지시간) ANSA 통신 등에 따르면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당 소속인 피오라몬티 장관은 지난달 30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학교 교실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낼 것을 제안했다.
그는 "학교가 세속화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상징물이 표출되기보다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도록 하는 게 좋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학교를 특정 종교가 지배하는 공간이 아닌, 종교·문화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곳으로 만들자는 취지다.
피오라몬티 장관은 또 교실 벽에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 사진 대신 헌법 조문과 함께 세계 지도를 걸자는 제안도 했다.
그의 발언에 가톨릭계는 벌집을 쑤신 듯한 분위기다.
이탈리아추기경회의(CEI)의 사무총장인 스테파노 루소 추기경은 피오라몬티 장관이 경솔했다고 지적하며 "십자가는 우리 문명의 문화적 뿌리 가운데 하나다. 이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극우 정당 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도 이날 "십자가는 우리의 문화이자 정체성이며 또한 역사"라면서 "누구든 이를 건드리면 곤경에 처할 것"이라며 가톨릭계를 거들었다.
이러한 비판론에 대해 피오라몬티 장관은 구체적인 언급은 삼가면서도 "무익한 논쟁이 아니다"라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차 피력했다.
이 와중에 이탈리아의 전통 음식인 '토르텔리니 논란'까지 더해지며 종교적 대립은 한층 가열되는 양상이다.
에밀리아 로마냐주(州)에서 탄생한 토르텔리니는 돼지고기와 치즈, 프로슈토(이탈리안 햄) 등으로 속을 채운 만두형 파스타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요리 가운데 하나다.
토르텔리니 논란은 에밀리아 로마냐 주도인 볼로냐 교구를 관장하는 개혁 성향의 마테오 추파 추기경이 오는 4일 성 페트로니오 축일에 돼지고기 대신 닭고기를 넣은 토르텔리니를 먹자고 제안하면서 불거졌다.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무슬림을 배려하고 문화적 통합을 촉진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하지만 가톨릭 전통주의자들과 보수 정당들은 이 문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살비니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잘못 이해되고 있는 '존중'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다소 과격한 표현을 동원해 거칠게 비난했다.
국민의 80%가 가톨릭 신자인 이탈리아에선 세속주의자와 가톨릭 전통주의자들 간 특정 사안별로 종교적 논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돼왔다.
특히 피오라몬티 장관이 끄집어낸 '십자가 논란'은 현지에서 상당히 민감한 이슈로 거론된다.
유럽인권재판소는 2009년 학교 교실에 십자가를 거는 게 종교와 교육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세속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줬으나 논쟁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전했다.
작년엔 동맹이 공공기관 건물에 십자가 설치를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면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의회에서 부결되기도 했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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