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시선, 난민에서 녹색으로
오스트리아서 위세 떨던 극우 추락, 녹색 부활
獨집권당, 녹색당 견제 나서…극우당 위협 여전
(베를린·제네바=연합뉴스) 이광빈 임은진 특파원 = 독일 제1당인 기독민주당의 베를린 중앙당사 유리 외벽에 '미래를 위한 월요일부터 금요일'(Monday to Friday for Future)이라는 슬로건이 걸렸다.
스웨덴의 '환경 지킴이 소녀' 그레타 툰베리(16)가 이끄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forFuture) 운동에서 응용한 말이다.
녹색당사에 붙어있을 법한 슬로건이 중도보수 정당에 걸린 탓인지 눈길을 끌고 있다.
극우성향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 대한 대응에 골몰하던 기민당이 올해 들어 녹색당 견제에도 부심하는 모양새다.
이런 변화는 독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5월 유럽의회 총선에 이어 지난달 말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유럽의 2015∼2016년 '난민위기'에 편승해 최근 몇 년간 급부상했던 극우정당의 진격이 주춤한 듯한 형세다.
대신 유럽에서 폭염과 가뭄 등으로 기후변화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녹색당으로 표가 쏠리는 추세다.
유럽에서 난민 문제가 골칫거리로 남아있고, 극우·포퓰리즘 정당의 위세가 여전하지만 유럽 정치에서 관심의 초점은 녹색정치로 옮겨가는 것이다.
극우·포퓰리즘 정당에 표를 잠식당하던 기성 정치권의 중도진보와 중도보수 정당들은 녹색당에까지 치이면서 퇴조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 오스트리아 총선서 녹색 뜨고 극우 지고
유럽인들의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 촉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지난달 29일 진행된 오스트리아 총선이다.
개표 결과, 극우당은 2년 전 선거 때보다 10%포인트 가까이 떨어지며 날개 없이 추락한 반면, 기후 대응을 공약으로 내건 녹색당은 부활했다.
극우 자유당의 경우 지난 2017년 총선에서 당시 유럽을 뜨겁게 달군 난민 이슈로 제3당에 올랐다.
'난민 위기'로 이주민이 유럽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고 이에 대한 유럽인의 반감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자유당은 반(反)난민 정책을 선거 전략으로 내세우며 주요 정당으로 거듭난 것이다.
제1당을 차지한 국민당과 함께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부총리 자리까지 꿰찬 자유당은 국경선 경비 강화 및 이주민에 대한 지원 축소 같은 포퓰리스트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불과 1년 반 만에 바뀐 민심을 읽는 데 실패, 올해 총선에서 득표율이 10%포인트 가까이 뚝 떨어졌다.
유권자들은 최근 이상 고온으로 유럽이 신음하자 기후 문제에 더 관심을 뒀지만, 자유당은 여전히 포커스를 이주민에 맞추면서 많은 표를 잃었다.
반면 녹색당은 기록적인 폭염과 사라지는 빙하 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년 전 선거에서 득표율이 4%에도 미치지 못해 의석 확보에 실패했지만, 올해는 득표율이 3배 이상 껑충 뛰면서 정치권에 '녹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이미 예고됐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반년마다 조사하는 유로 바로미터에 따르면 올해 봄 조사에서 오스트리아인은 지구 온난화(11%)를 가장 주요한 어젠다로 꼽았다.
특히 총선 이틀 전 열린 기후변화 대응 촉구 집회에 오스트리아에서 전국적으로 15만 명이 참여하면서 이런 경향은 뚜렷이 나타났다.
의회도 지난달 25일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기후 변화에 대한 대처를 최우선 과제로 삼기로 하면서 여론에 동참했다.
결국 녹색당은 이번 총선에서 전체 183석 중 20석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다시 한번 제1당이 된 국민당의 주요한 연정 파트너로 거론되고 있다.
베르너 코글러 녹색당 대표는 총선 직후 "(연정과 관련한) 당의 역할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면서도 "국민당은 기후와 빈곤 문제에 대해 극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말해 연정 참여 시 적극적인 기후 정책을 내놓을 것을 암시했다.
◇ 獨 정치 화두는 '녹색'…옛 동독지역서 극우 부상에 우려
올해도 독일에서는 극우세력의 성장이 최대 근심거리 중 하나다.
지난달 AfD는 그동안 강세를 보여온 옛 동독지역인 작센주(州)와 브란덴부르크주 선거에서 각각 2위 정당 자리를 차지했다.
작센주에서만 AfD는 지난 선거보다 17.8% 포인트 뛰어오른 27.5%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며 극우 성장에 대한 고민을 사회에 남겼다.
AfD는 반(反)난민 정서와 반이슬람 정서를 파고들었을 뿐만 아니라 '2등 국민'이라는 옛 동독지역 주민의 불만을 끌어안은 전략이 주효했다.
그러나 올해 전반적으로는 AfD의 성장세가 상당히 완만하다.
최근 여론조사 지지율은 15% 정도다. 올해 초 18% 정도까지 올랐다가 떨어진 셈이다.
지난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AfD는 11% 정도 득표하며 2017년 총선 득표율(12.6%)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표를 받았다.
옛 동독지역에서는 선전했지만, 옛 서독지역에서 기대치보다 부진한 탓이었다.
그런데 녹색당은 작센주와 브란덴부르크주 선거에서 각각 2.9% 포인트, 4.6% 포인트 오른 8.6%, 10.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이를 토대로 녹색당은 AfD를 제외한 기성정당과의 주 연립정부 구성 논의에도 참여 중이다.
앞서 지난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녹색당은 이전 유럽의회 선거보다 9.8% 포인트 오른 20.5%를 득표하는 기염을 토했다.
기민당에서도 기존 지지자들이 AfD보다 녹색당으로 변심하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유럽의회 선거가 끝나자마자 기민당을 포함한 대연정은 선거 부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기후변화에 대한 미진한 대응을 꼽았다.
결국 대연정은 지난달 말 전기차 보조금을 확보하고 세금 성격의 탄소 배출량 가격제를 실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기후변화 대응책을 발표하며 녹색으로 기운 표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독일 기성 정치권에서는 AfD의 부상이 여전히 가장 큰 위협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환경친화적인 정책이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 종사자와 산업적 발전이 필요한 농촌 지역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AfD가 불만 정서를 흡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1위 기민당의 턱밑까지 추격한 녹색당이 지방정부 연정에 참여해 실질적인 정책 수행 능력을 보일지도 향후 '녹색 물결'의 지속성에 주요 변수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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