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비트코인 등 분산형 가상화폐와는 정반대 철학
"'외부 세력' 맞서 中 주도 금융 질서 추구가 목적"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근대 이래 인류 역사에서 국가 법정 화폐는 지폐나 금속 동전의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곧 물리적 실체가 없는 디지털 정보가 돈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할 전망이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조만간 '디지털 화폐'(Digital Currency) 발행에 나설 태세다.
최근 수년간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가 빠르게 발전했지만 현재로서는 국가의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는 나라는 중국이 최초가 될 가능성이 크다.
관영 영자지 차이나데일리는 최근 인민은행이 디지털 화폐 결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중국이 세계 첫번째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발행 국가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 윤곽 드러내는 세계 최초 '디지털 법정 화폐'
인민은행 고위 당국자들의 공개 발언과 중국 안팎의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인민은행은 디지털 화폐 발행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다.
무창춘(穆長春) 인민은행 지불결제국 부국장은 지난 8월 10일 공개 학술회의에서 "디지털 화폐를 당장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이어 포브스는 같은 달 27일 복수 소식통들을 인용, 중국이 연중 최고 쇼핑 축제일인 11월 11일 광군제(光棍節)를 앞두고 디지털 화폐 발행을 시작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다만 인민은행은 아직 구체적인 발행 시점은 신중히 검토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강(易鋼) 인민은행장은 지난달 24일 기자회견에서 "언제 내놓을 수 있을지 구체적인 시간표를 갖고 있지는 않다"며 "일부 연구, 테스트, 평가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도입하려는 디지털 화폐의 모습도 점차 구체화하고 있다.
이 행장 등 인민은행 당국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 디지털 화폐는 쉽게 말해 '디지털 현금'으로서 종이나 동전으로 된 위안화 현금의 거의 완벽한 대체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화폐는 현금 통화를 뜻하는 본원통화(MO)의 일부를 대체하며 인민은행과 시중 상업은행 차원의 이원화 방식으로 운영된다.
발행 기관인 인민은행이 직접 국민에게 디지털 화폐를 공급하지 않고 시중은행 등 금융 기관이 고객들을 상대하게 된다는 뜻이다.
업계에서는 인민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화폐가 공상은행을 비롯한 4대 국유상업은행과 양대 인터넷 플랫폼인 알리바바·텐센트, 결제 청산 기관인 유니온페이 등 총 7곳에 우선 공급될 것으로 본다.
이후 개인이 이들 기관에서 '충전'한 디지털 화폐는 스마트폰 앱인 '전자 지갑'에 담긴다. 사용자들은 중국에서 널리 쓰이는 전자 결제 플랫폼인 알리페이처럼 디지털 화폐를 쓸 수 있게 된다.
지불 행위가 아닌 경제 주체 간의 송금 역시 가능하다.
인민은행은 지진 같은 재난재해로 인터넷이 끊어진 상황에서도 개인들이 서로 디지털 화폐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근거리 통신 기술을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 "디지털화 장점 커" vs "국가 통제권 비대 우려"
법정화폐를 디지털화하면 돈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 편리하고, 화폐 제작과 유통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또 위조지폐 제작·유통 등 범죄 행위도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화폐를 도입했을 때 획기적인 장점이 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는 중국 정부의 의도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디지털 화폐 도입에 이처럼 적극성을 보이는 이유는 자국 중심의 디지털 경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중국은 비트코인이나 페이스북의 리브라 등 '외부 세계'의 가상화폐 질서가 자국에 영향을 주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중국은 그간 자국 내 가상화폐 상장(ICO)과 거래를 전면 금지하는 강경책을 고수해왔다.
무창춘 부국장은 지난달 한 공개 강연에서 디지털 화폐 도입과 관련해 "그것은 우리의 통화 주권과 법정 통화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는 비 오는 날에 앞서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중국의 디지털 화폐는 중앙집중형으로 관리된다. 기반이 되는 기본 철학상 중국의 디지털 화폐는 분권과 익명화를 추구하는 비트코인 등 기존의 가상화폐와는 정반대의 특징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인민은행이 도입할 디지털 화폐는 분산형 장부 관리 기술인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강 행장은 이와 관련해 "블록체인 기술을 고려할 수도, 현존 전자 결제의 기초 위에서 진화한 신기술을 쓸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무 부국장은 작년 11월 11일 광군제 날 가장 거래가 몰렸을 때 초당 9만2천771건의 거래가 이뤄졌다면서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결제로는 이 같은 방대한 거래를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디지털 화폐 도입을 통해 중국 정부는 현금 단위의 돈의 흐름까지 면밀하게 모니터링할 수 있는 기술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현재는 어느 나라에서나 금융 기관을 벗어나 국민의 지갑이나 개인과 기업의 금고에 쌓인 현금의 흐름을 추적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향후 디지털 화폐가 도입되면 아무리 큰돈도 항상 누군가의 전자지갑 안에서 머무르게 된다.
인민은행은 전자지갑의 익명성이 보장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특정 개인의 지갑에 디지털 현금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누가 누구와 어떻게 돈을 주고받았는지에 관한 데이터가 고스란히 빅데이터로 쌓이게 된다.
현금에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꼬리표'가 달려 돌아다니게 되는 셈이다.
인민은행은 디지털 화폐 도입으로 돈세탁과 테러자금 유입 차단이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개인들의 디지털 화폐 보유 현황이나 거래 내역이 감독 당국에 노출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의 힘이 과도하게 커질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중국이 도입하려는 디지털 화폐가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으로 확산하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인 타일러 코원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대부분의 은행과 금융 시스템은 중앙화와 탈중앙화 사이의 복잡한 조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며 "만일 국가 기관이 디지털 통화를 직접 발행한다면 모든 민간 영역에 영향을 줌에 따라 너무 많은 상업 활동이 중앙집권적인 규제에 종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c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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