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 후 '토속신앙 반대' 성명…교황청, 강력 비난·수사의뢰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전 세계 가톨릭의 본산인 바티칸에서 남미 아마존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Synod)가 한창인 가운데 보수 가톨릭계 인사들이 성당에 보관된 원주민 여인 조각상을 훔쳐 폐기하는 일이 발생해 현지 가톨릭계가 시끌시끌하다.
22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가톨릭 근본주의 성향의 보수파 일부가 전날 새벽 성베드로 광장 인근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폰티나 성당'에 몰래 들어가 나무로 제작된 원주민 여인 조각상 4개를 들고 나왔다.
이들은 이후 성베드로 광장과 가까운 산탄젤로 다리까지 걸어가 훔친 조각상을 난간에 놓고 하나씩 밀어 테베레강 아래로 떨어뜨렸다.
범인 가운데 한 명은 전체 과정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공개했다.
해당 조각상은 나체의 원주민 임신부가 부풀어 오른 배를 만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대지'(Mother Earth)를 상징한다고 한다. 아마존 시노드를 기념해 원주민들이 가지고 온 여러 상징물 가운데 하나다.
사건 이후 보수 가톨릭계 웹사이트인 '라이프사이트 뉴스'에는 일부 활동가들이 발표한 성명이 게재됐다. 이들은 자신들이 절도의 배후라며 '토속신앙은 용인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또 가톨릭 교회가 내부 구성원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우리는 이를 용납할 수 없으며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다. 당장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라이프사이트 뉴스는 지난주 토속 신앙적 상징물을 시노드에서 치워달라는 청원을 바티칸 교황청에 제기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교황청은 깊은 유감의 뜻을 표했다.
교황청 홍보 책임자인 파올로 루피니는 "조각상은 생명과 비옥함, 대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누차 얘기해왔다"면서 '대화의 정신에 반하는 행태', '반항적 태도' 등의 표현을 동원해 가해자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바티칸 뉴스를 총괄하는 안드레아 토르니엘리도 "전통과 교리를 명분으로 모성과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상징물을 경멸적으로 없애버렸다"고 비판했다.
교황청은 이번 사건의 범인을 밝혀달라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상태다.
가톨릭계 일각에서는 아마존 시노드를 기점으로 가톨릭 내부에서 증폭하는 '보혁 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번 시노드에서는 결혼한 남성에게 사제품을 주는 안 등이 의제로 포함돼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렀다.
찬성하는 쪽은 아마존의 사제 부족 문제를 푸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보수 가톨릭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는 수백년 간 이어져 온 가톨릭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시노드는 이번 주를 끝으로 논의를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권고안에 담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제출할 예정이다. 권고안은 구속력 없이 교황의 최종 판단을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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