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대 연구진, 유리 헤모글로빈의 '유해 작용' 차단 확인
(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뇌출혈을 일으킨 환자는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심각한 뇌 손상이 따르곤 한다.
이런 뇌 손상은 중증 심신 장애로 이어지기 쉽고 생명을 앗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뇌출혈에 따른 뇌 손상의 주범은, 적혈구에서 분리된 '유리 헤모글로빈(free hemoglobin)'이다.
유리 헤모글로빈은 혈장에서 합토글로빈(haptoglobin)과 결합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정상 혈장에는 미량만 존재하고 부적합수혈이나 체외순환 용혈 등에 상대적으로 많다.
그런데 뇌출혈이 발생한 뒤 뇌척수액에 순도 높은 합토글로빈을 주입하면, 헤모글로빈의 해로운 작용을 막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스위스 취리히대(UZH) 과학자들은 이런 내용의 논문을 국제 학술지 '임상 연구 저널(The Journal of Clinical Investigation)'에 발표했다.
22일(현지시간) 온라인(www.eurekalert.org)에 공개된 논문 개요 등에 따르면 뇌혈관 안쪽과 중간 뇌막 사이의 미세한 틈에 생기는 뇌출혈은 통상적으로 뇌동맥류에서 비롯된다.
뇌동맥류(cerebral aneurysm)는 뇌혈관의 내측 탄력 층과 중막이 손상되면서 혈관 벽이 부풀어 오르는 걸 말한다.
이런 유형의 뇌출혈은 예고 없이 불시에 터져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뇌출혈 환자 가운데 상당수가 젊은 나이지만, 두개골 내부 압력 증가로 사망하기도 한다.
취리히대 병원(USZ) 신경외과 과장인 루카 레글리 교수는 "뇌출혈이 멈춰 환자가 안정돼도 발생 2주 안에 뇌 손상이 생길 수 있다"라면서 "이는 종종 심한 장애로 이어지며, 환자가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뇌출혈이 발생하고 수일이 지나자 고였던 혈액이 분해되면서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 뇌척수액과 합쳐지는 걸 관찰했다. 뇌 조직을 손상하는 유리 헤모글로빈은 바로 뇌척수액에서 나온다.
헤모글로빈은 주로 산소를 운반하는 기능을 하지만 뇌출혈이 생겼을 땐 유리 헤모글로빈이 신경 손상에 깊숙이 관여한다.
연구팀은 환자의 혈액 샘플과 동물(양)의 혈액에 테스트해, 유리 헤모글로빈이 혈관 경련을 유발하면서 뇌 조직에 깊숙이 파고든 뒤 신경세포를 손상한다는 걸 확인했다.
헤모글로빈을 이렇게 위험하게 만드는 건 바로 철(iron) 성분이다. 헤모글로빈 단백질의 중심부에서 발견되는 철분은 화학 반응에 활발히 관여한다.
그러나 혈중 합토글로빈이 유리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면 혈관, 신장 등에서 유리 헤모글로빈이 일으키는 유해한 작용을 차단한다.
문제는, 뇌의 합토글로빈 농도가 매우 낮아, 뇌출혈에 수반하는 헤모글로빈의 뇌 손상을 충분히 방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양(羊)의 뇌척수액에 고순도 합토글로빈을 주입하는 실험을 통해, 합토글로빈이 혈관 경련을 방지하고, 유리 헤모글로빈의 뇌 조직 침투를 차단한다는 걸 확인했다.
이 발견은 특히 지주막하 출혈(subarachnoid hemorrhage) 환자에게 큰 의료적 잠재력을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논문의 제1 저자인 미하엘 후겔스호퍼 박사는 "뇌출혈 환자의 신경학적 예후(豫後)와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che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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