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붕괴 30년…주역 레이건 동상은 '베를린 입성' 좌절

입력 2019-11-07 11:29   수정 2019-11-07 13:58

장벽붕괴 30년…주역 레이건 동상은 '베를린 입성' 좌절
외교압력에도 시정부 거부로 결국 美대사관내 설치
"신자유주의·獨핵배치 논란에다 트럼프발 반미감정도 작용"



(서울=연합뉴스) 김성진 기자 = "고르바초프(옛소련 공산당 서기장)는 당장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사자후를 토했던 고(故)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동상이 정작 베를린 장벽 30주년을 맞아 베를린 시내에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 동상은 대신 베를린 주재 미국 대사관 경내 테라스에 설치돼 자신의 연설 장소를 굽어보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연설에서 구소련 카운터파트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서기장에게 베를린 장벽을 허물라고 촉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1961년 이후 동·서독 분단의 상징으로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그의 연설대로 1989년 11월 9일 결국 붕괴됐다.
미국은 냉전 붕괴의 주역인 레이건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그의 동상을 베를린 시내에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지난 수년 동안 베를린 시 정부가 거부했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할 수 없이 베를린에서 치외법권 지역인 미 대사관 경내에 7피트(약 2.13m) 높이 동상을 설치키로 했다.
동상 제막식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전야인 8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다.
동상 제작을 주문한 레이건 대통령 기념재단은 베를린 공공장소에 동상을 못 세운 데 대해 전·현직 미 외교관들과 마찬가지로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베를린 일부 정치인들은 레이건은 이미 베를린 명예시민이므로 그에게만 특혜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입장은 1980년대 당시 구서독 좌파가 레이건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독일 내 핵미사일 배치 등에 격렬히 저항한 데 따른 역사적 유산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의 베를린 방문 당시에도 극좌 시위대의 폭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더구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 대해 걸핏하면 비판적 언사를 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는 과거의 맹방이 아니다.
냉전 막바지에 '악의 제국' 구소련에 맞서 자유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한 레이건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베를린 장벽을 두 번이나 방문했다.
2011년 레이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후원하에 레이건 기념사업이 활발해졌고 그의 동상들이 런던과 조지아 수도인 트빌리시뿐 아니라 구(舊)공산권 동부 및 중부 유럽 등 곳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베를린 시 당국만은 전·현직 미 대사들의 은근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동상 건립을 거부했다.
그러다가 겨우 레이건이 역사적 연설을 한 곳에서 가까운 보도에 조그만 기념판을 설치하도록 허용했다.
올해 리처드 그레넬 독일 주재 미국 대사는 레이건의 연설이 있었던 브란덴부르크문을 굽어보는 대사관 테라스를 레이건 대통령의 이름으로 부르고 거기에 동상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에 레이건 기념재단이 동의해 조각가 채스 패건에게 동상 제작을 의뢰했다. 2009년 워싱턴 미 의회 의사당 로툰다홀에 들어선 레이건 동상을 만든 바 있는 패건은 이번 동상의 재료에 베를린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을 혼합했다.
레이건 기념재단 관계자는 미 대사관 내에 동상을 세운 것과 관련, "미국 영토에 세우긴 했어도, 최소한 그 땅은 베를린 시내에 있다"면서 스스로 위로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sungj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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