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야권지도자 나발니 지지자 수백명 사례 보도
전문가 "심리 저항선 붕괴…푸틴 대적 말라는 메시지 뚜렷"
(서울=연합뉴스) 김성진 기자 = 러시아에서 저명한 반체제 인사를 지지할 경우 자기도 몰래 은행 계좌에 일반인이 평생 갚기 힘든 규모인 약 14억원의 빚이 청구될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하게 생겼다.
7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전역에 걸쳐 야권 활동가 수백명이 최근 자신의 계좌에 저마다 7천500만 루블(약 14억원)의 채무가 부여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액수는 러시아 수사관들이 야권 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의 조직이 지하 범죄단체를 위해 돈세탁을 했다고 주장한 액수와 똑같다.
실제로 나발니의 오랜 지지자인 안드레이 예고로프는 지난 9월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모스크바 법원 명령으로 자기 계좌가 동결되고 7천500만 루블 적자가 기록돼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앞서 러시아 수사기관은 지난 8월 나발니가 이끄는 반부패재단(FBK) 조사에 들어갔다. 나발니는 이에 대해 자기 단체를 와해시키려는 정치 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WSJ은 반체제 인사 지지세력의 은행 계좌까지 터는 사건이 주는 메시지가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맞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라는 것이다.
예고로프는 "사람이 현금에 접근할 수 없고 결코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심리적 저항선이 무너질 수 있다"고 토로했다.
러시아 당국이 이처럼 극단적 금융탄압까지 해가면서 나발니 지지세력을 박멸하려는 이유는 이들이 무시할 수 없는 '체제 위협' 세력이 됐다는 판단에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올해 43세의 변호사 출신인 나발니는 2012년 반(反)푸틴 가두시위를 처음 조직하면서 부상해 수년 새 러시아의 가장 유력한 야당 지도자가 됐다.
나발니가 이끄는 반부패재단은 전국적 조직망을 가진 야권 세력으로 성장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를 비롯해 정부 고위 관료들의 뇌물 수수 혐의를 폭로했다.
푸틴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강력한 정치 통제시스템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억눌러왔지만, 나발니 지지세력은 점차 세를 불려 푸틴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됐다.
러시아 당국은 나발니 그룹을 "미국이 푸틴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앞잡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궁)은 그동안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 등 법적 소송을 통해 독립성향의 단체들을 파산시키거나 복종시켰다.
그러나 시위가 끝난 후 나발니 등 다른 야당 지도자들에 은밀히 취한 이번 금융탄압 조치들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나발니 지지세력의 조직력과 투표를 통한 투쟁방법에 대해 그만큼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나발니 지지세력은 지난 여름 모스크바에서 수년 만에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으며 지난 9월에는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에서 누가 뽑혀도 상관없으니 푸틴 계열 후보만 찍지 말라는 '스마트 선거' 운동을 벌여 집권당 후보가 3분의 1이나 낙선했다.
임기가 최소 5년은 더 남은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권을 연장해 장기집권을 이어가는 데 나발리의 지지세력이 그만큼 무시하지 못할 걸림돌로 등장한 것으로 관측된다.
나발니 측에 따르면 현재 나발니 지지자들이 갖고 있는 계좌 500개가량이 무더기로 동결돼 있다.
또 나발니의 시위 때문에 장사를 못했다면서 모스크바 시내 한 식당이 지난달 25만 루블의 손배소를 거는 등 나발니와 야당 지도자들도 총 3천200만 루블 이상의 손배소에 직면해 있다.
나발니 지지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실상 금융 파산자가 된 예고로프는 요즘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용돈을 얻어가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예고로프는 신문에 "야당 지지자로 등록되는 순간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서 "7천500만 루블 빚더미에 올라앉고 죽을 수도 있지만 이미 싸우기로 결정한 일"이라고 말했다.
sung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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