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상소기구 내일 마비…세계무역에 '정글의 법칙' 닥치나

입력 2019-12-09 11:17   수정 2019-12-09 14:32

WTO 상소기구 내일 마비…세계무역에 '정글의 법칙' 닥치나
美, 위원선임 '보이콧' 유지…이변 없는 한 개점휴업
EU·캐나다 자체기구 검토…"트럼프 떠나면 기능회복" 희망도


(서울=연합뉴스) 김성진 기자 = 세계 무역분쟁의 '대법원' 역할을 해온 세계무역기구(WTO) 상소 기구(Appellate Body·AB)가 미국의 상소위원 선임 보이콧으로 10일 기능이 마비될 예정이다.
세계 무역이 힘에 좌우되는 혼란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유럽연합(EU) 등 일부 국가들은 앞다퉈 대안 마련을 모색하고 있다.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깜짝' 대타협이 없는 한 AB가 10일부터 '개점 휴업'에 들어갈 것이 확실시된다.
실제로 WTO 본부가 있는 제네바 주재 미국대표부의 드니스 시어 대사는 지난 6일 미국이 보기에 실질적인 AB 개혁안이 도출되지 않았다면서 상소위원 선임에 협조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AB는 최소 3명의 상소위원이 심리를 하며 이 가운데 2명의 임기가 10일 만료된다.
WTO는 만장일치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미국이 반대하면 AB 기능 회복은 요원한 상태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주 미국 출신 상소위원이 AB 사무국장의 '중립성'을 공격하자 다른 인도, 중국 출신 상소위원이 이에 반발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AB 상소위원 3명 사이에도 내홍이 벌어졌다.
필 호건 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1995년 설립된 WTO는 창설 24년 만에 최대위기에 봉착했다고 사태를 진단했다.
그는 국제무역을 다스리는 규칙이 재판을 통해 강제되지 못하면 힘의 논리가 판치는 '정글의 법칙'만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EU는 AB를 일시적으로 대체할 비공식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구체적으로 EU, 캐나다 등은 무역분쟁 재판이 기본적으로 2심 체제가 돼야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WTO 패널 1심을 거친 후 2심 겸 최종심인 AB가 제 기능을 못 한다면 자체적으로라도 별도의 항소심을 운영하겠다는 복안이다.
EU와 캐나다는 WTO 재판을 본떠 일시적인 항소 절차를 마련하기로 합의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이는 AB 심리가 교착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양자간 무역분쟁을 처리하게 되며, 노르웨이도 여기에 합류하기로 동의했다.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EU는 이 같은 자체 법적 강제기구를 이번 주 후반 공개할 예정이다.
이 새로운 기구는 비록 미국을 명시적으로 겨냥하지 않지만, 기능이 정지된 AB에 상소함으로써 WTO 소송을 좌절시키려는 나라들에 대해 브뤼셀 당국이 관세를 부과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EU 관리들은 노르웨이, 캐나다 외에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더 큰 경제권도 이 같은 일시적 시스템에 동참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WTO가 향후 새로운 합의를 협상하겠지만, 그 사이 AB를 대체할 과도기구라도 없으면 WTO 1차 패널 심리에서 항소한 어떤 분쟁도 어정쩡한 상태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WTO 주요 회원국들은 AB를 포함해 광범위한 WTO 개혁안에 대해 열려있는 자세이다.
그러나 미국은 AB가 기능을 회복하더라도 정례적인 상소심 역할을 하기보다는 그 기능을 대폭 축소해 1심 패널재판에 대한 기술적 수정 역할만 하는 것이 당초 설립 취지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 됐든 무역분쟁 판결에 최종적 권위를 갖던 AB가 당분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각국이 무역분쟁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거침없이 고율관세를 치고받는 전쟁에 돌입할 위험이 커졌다.
공교롭게도 AB 기능이 사실상 정지하는 첫날인 11일은 18년 전 중국이 WTO에 가입한 날이기도 하다.
미국은 이미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중국이 WTO에서 아직 개발도상국 특혜를 버젓이 누리는 반면 중국의 '불공정' 무역행위를 단속하려는 자신들의 손발을 도리어 AB가 판결을 통해 제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부터 시작된 미국의 AB 상소위원 선임 보이콧은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본격화됐다.
다른 나라들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면서도 AB를 아예 없애기보다는 고쳐서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약소국들 입장에서 무역분쟁의 최종재판관 역할을 하는 AB가 없을 경우 힘센 미국의 입맛대로 휘둘리기 쉽기 때문이다.
피에르 가타즈 유럽경제인연합회(CEB) 총재는 지난 6일 임박한 AB 기능마비를 우려하면서 "현 시스템은 비즈니스와 소비자들에게 큰 혜택을 준 WTO의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많은 국가는 트럼프 행정부 임기가 끝나는 2021년이나 2025년에라도 AB 기능이 회복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NYT는 상황을 설명했다.
sungj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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