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국제 무역 분쟁의 조정자인 세계무역기구(WTO)가 미국의 몽니로 출범 24년 만에 사실상 와해 위기를 맞았다. 그렇지않아도 미·중 무역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세계 무역은 추가적인 충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로서는 심판 없는 국제 무역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9일 외신에 따르면 국제 무역 분쟁의 대법원 역할을 해온 WTO 상소기구(Appellate Body·AB)가 최소 법적 요건인 '상소위원 3명'을 채우지 못해 10일부터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원래 7명인 정원은 미국의 반대로 임기만료 위원의 후임을 공석으로 두는 바람에 3명으로 줄었다가 이마저도 2명이 후임자를 찾지 못하고 10일로 임기를 끝내게 된다. 164개 회원국의 만장일치제에서 미국은 줄곧 상소위원 선임에 반대해왔다. 2017년 강력한 보호무역을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위상이 현저하게 약화한 WTO는 상소기구의 무력화로 체제 존속의 중대 기로에 섰다고 할 수 있다. 국제 사회는 중지를 모아 어떤 방식으로든 조속히 WTO 분쟁조정기구의 형해화를 막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인 가트(GATT) 체제를 대체하면서 1995년 출범한 WTO는 사법부에 해당하는 독자적 분쟁해결기구를 갖추고 각종 국제무역 분쟁에서 준사법적 권한을 행사하며 자유롭고 공정한 통상질서를 수호해왔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 경제의 G2로 부상하고 WTO의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미국을 상대로 해마다 막대한 무역흑자를 내면서 WTO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비관세 장벽을 쌓거나 국가보조금과 환율조작 등으로 불공정 게임을 하는가 하면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다른 나라를 약탈하는데도 WTO가 이를 용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은 다자간 무역 협정 대신 자국의 우월적 지위를 활용할 수 있는 양자 협정을 선호하고 있다. EU와 중국, 일본,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타 회원국들은 WTO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상소기구를 대체할 비공식 기구를 가동할 것으로 보이지만 세계 경제의 최강국인 미국이 끝까지 보이콧할 경우 지금까지 유지됐던 WTO의 위상과 역할은 종말을 고한다고 봐야 한다. 설사 타협책이 나와 미국이 WTO의 분쟁 조정 기능 정상화에 협조한다고 해도 미국의 입김이 과도해질 경우 중국 등의 반발로 이전의 권위를 회복하긴 어려울 것이다.
필 호건 유럽연합(EU) 무역 담당 집행위원이 언급한 대로 국제무역의 규범이 재판을 통해 강제되지 못하면 힘의 논리가 판치는 '정글의 법칙'만 남게 될 것이다. 국제 무역 분쟁에서 믿음직한 중재자가 사라질 경우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타격이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과의 무역 분쟁에서 우리나라는 WTO의 분쟁 해결 절차에 의존해 국익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카오스 상태인 국제 통상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지 불투명하다. 우선은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력해 WTO의 분쟁 조정 기능을 정상화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길 바란다. 다른 한 편으로는 주요 무역 상대국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통상 외교를 강화하고 양자 또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을 확대해 무역의 영토를 넓혀야 한다. 특히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를 추구할 미국의 움직임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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