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BBC,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 재조명

입력 2019-12-24 16:13  

영국 BBC,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 재조명
출생부터 생이별까지…한국전쟁 피난민 사연 소개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기자 =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미국 선박을 타고 고향을 등져야 했던 '흥남철수' 피난민의 애끊는 사연을 영국 공영 BBC 방송이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24일 조명했다.
흥남철수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국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이 궁지에 몰리자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함경남도 흥남항에 선박 100여대를 보내 병력과 물자 등을 실어나르며 피난민을 대피시킨 작전이다.
흥남항을 가장 마지막으로 떠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최대 60명이 탈 수 있게 만들어졌지만, 피난민과 군인 등 총 2만여명을 태우고 3일간 파도를 가르며 경상남도 거제항에 도착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은 군수물자 25만t을 버리고 피난민 1만4천여명을 태웠다.
이 배에도 마실 물도, 식량도 없었지만 숨진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도 불린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이 배를 타고 남측으로 내려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배에서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은 탯줄을 이로 끊어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만 5명이었다는 점이라고 BBC는 소개했다.
한국식 이름을 모르는 미군은 아이들이 태어난 순서대로 숫자를 매겨가며 '김치'라고 불렀다.
가장 먼저 세상의 빛을 봐 '김치 1'로 불렸던 손양영(69) 씨는 북한에 남아 있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두 형을 일평생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 손씨의 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배에 탈 수 없다고 판단하고 9살, 5살 난 두 아들을 삼촌에게 맡기고 만삭의 아내와 탑승했다.
두 아들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손씨는 같은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난 형제가 이렇게 떨어져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데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며, 하루빨리 통일이 이뤄져 형들을 만나고 싶다며 눈물을 보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막내 이경필(69) 씨는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70년째 정박해 있는 거제에서 활동하는 수의사가 됐다.
'김치 5'라는 이름이 처음에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제는 명함에 새기고 다닐 정도로 애착을 갖게 됐다.
어머니의 출산을 도왔던 미군을 만나봤다는 이씨는 흥남철수 이야기를 후대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거제항에 있는 선박에 기념비를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17살에 엄마와 여동생의 손을 잡고 배에 올라탔던 한보배(86) 씨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를 타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는 것만은 확신했던 순간이었다.
한씨는 갑판에서 바라본 흥남항은 "불바다"였다고 묘사했다. "항구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배에 타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미어지게 한다"는 그는 "전쟁은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run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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