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터키 난민협정 4년만에 폐기위기…"EU 목에 칼 겨눠진 꼴"

입력 2020-03-03 11:50  

EU·터키 난민협정 4년만에 폐기위기…"EU 목에 칼 겨눠진 꼴"
터키의 EU 진입로 개방에 이주민 수만명 그리스로
에르도안 지원강화 압박에 EU집행위 "필요한 부분 논의"
"협박당하며 재협상은 곤란" 네덜란드 등 거부 목소리도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터키가 난민 등 이주민에게 그리스에 접한 국경을 개방해 유럽행을 방치, 4년 전 유럽연합(EU)과 터키가 체결한 난민송환협정(난민협정)이 붕괴 위기를 맞았다.
앞서 지난달 29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난민에게 유럽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줄 것"이라고 선언한 후 터키·그리스 국경에는 시리아 난민 등 유럽으로 가려는 이주민 1만5천명 이상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2015년 '난민 위기'와 이듬해 난민협정 체결 4년 만에 또다시 터키·그리스 국경이 난민으로 붐비게 된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 등 유럽 정상들은 터키의 불법입국자 차단 중단을 비판하면서 난민협정을 지키라고 터키에 촉구했다.
2015년 시리아 난민 등 100만명이 넘는 이주민이 단기간에 유입되자 유럽 각국에서는 극우주의가 득세하고 중도 정부가 붕괴하는 등 정치·사회적 혼란이 일어났다.
EU가 이런 상황에서 이주민 대량 유입에 제동을 걸고자 추진한 것이 EU·터키 난민협정이다.



2016년 3월 18일 'EU·터키 성명'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난민협정 조건에 따르면 터키는 이주민의 EU행을 차단하고, EU 국경에 도착한 난민을 터키로 송환해 수용하는 데 합의했다.
EU는 매년 터키에 수용된 난민 7만명가량을 EU 각국에 재정착시키기로 약속했다.
터키가 이주민의 유럽행을 차단하는 대가로 EU는 총 60억유로(약 8조원)를 터키에 지원하기로 했다.
60억유로 중 47억유로는 EU가 지정한 사업에 배정됐고, 나머지는 일반적인 난민 사업에 지원됐다. EU는 터키 정부에 직접 자금을 이전하지 않고 '터키 체류 난민 지원 기구'를 통해 자금을 집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EU는 또 터키에 '무비자 입국'을 시행하고, EU 가입협상도 속도를 내겠다고 합의했다.
난민협정은 수치상으로는 '불법 입국' 차단에 효과적인 것으로 일단 평가됐다.
작년 3월에 나온 EU 집행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비자 등 합법적 서류 없이 국경에 도착한 인원은 97%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터키는 난민 약 400만명을 수용하게 됐다.




난민협정이 EU 각국의 부담을 일시적으로 덜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봉책'이라는 한계가 뚜렷해졌다.
터키 고위 당국자들은 비자 면제가 이행되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난민을 국경에 풀어버리겠다"며 수시로 위협했다.
터키 정부는 난민 수용 부담이 과도하다며 유럽이 분담 책임을 지라고 압박하고, 지원금을 터키 정부가 집행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위태롭게 유지된 난민협정은 최근 시리아 북서부에서 반군 진영의 전황이 불리해지며 폐기 위기에 직면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정권과 그 후견자 러시아가 마지막 반군 지역에서 공세를 펼치며 일대 주민 90만면 이상이 피란했다. 터키군과 시리아군이 직접 충돌하며 터키군에서도 큰 피해가 났다.
유럽 각국 언론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유럽의 재정·정치·군사 지원을 얻어내려고 난민협정 폐기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그리스 고위 인사는 "이제 난민협정은 죽었다"고 단언했다고 유럽 매체들이 2일(중부유럽 현지시간) 전했다.



EU 지도부도 2016년 난민협정의 효력이 다해가고 있고, 재협상 필요성이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작년 12월부터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를 이끄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새 이주민 협정' 추진 방침을 앞서 밝혔다.
난민 수만명을 국경에 방치하기는 인도주의 관점에서도 EU에 큰 부담이 된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터키 정부와 언제든 기꺼이 대화하고 "어느 부분에 지원이 필요한지, 대화를 시작할 올바른 토대가 무엇인지"에 관해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삼갔다.
미카엘 로트 독일 EU 담당 장관은 이날 독일 매체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EU가 정신을 차리고 지속가능한 이주민 정책을 개발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터키에 약점을 잡힌 채 마냥 끌려다닐 수 없다는 강경론도 만만치 않다.
또 반이민 정서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즉 브렉시트 등의 여파로 EU 내 이주민 '분담' 합의 자체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2016년 협정 체결에 참여한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는 "목에 칼이 겨눠진 채로" 터키와 협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EU 지도부의 한 고위 인사도 "새로운 이주민 위기가 생기면 대규모 인도주의 문제가 초래된다"며, "우리가 협상을 하겠지만 협박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tr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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