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저항의 상징 '세 손가락' 펴드는 태국 젊은이들

입력 2020-03-07 07:07  

[특파원 시선] 저항의 상징 '세 손가락' 펴드는 태국 젊은이들
지지 야당 강제 해산에 분노…70년대 민주화 투쟁 데자뷔?
영화 '헝거게임'서 유래…2014년 쿠데타 때 반대·항의 표시 등장



(방콕=연합뉴스) 김남권 특파원 = 태국에서도 여느 국가처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소식이 주요 뉴스로 연일 다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최근 태국 주요 언론 및 외신은 그동안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대학가의 잇따른 반정부 집회 소식을 비중 있게 전했다.
일각에서는 지난 1970년대 중반 군부 독재에 항거한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인 일련의 반정부 집회에서 태국 젊은이들이 '세 손가락'을 높이 펴들고 있는 모습이다.
태국 반 군부, 또는 친(親) 민주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이른바 '세 손가락' 표시다.



◇ '눈엣가시' 야당 강제해산…정적 제거 행태 '도돌이표'
대학가 반정부 집회는 지난달 21일 태국 헌법재판소의 야당 해산 결정이 직접적 원인이 됐다.
헌법재판소는 작년 총선 당시부터 군부정권을 비판하고 군부와도 각을 세워 온 '눈엣가시' 퓨처포워드당(FFP) 해산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3월 총선을 전후로 FFP가 타나톤 중룽르앙낏 당 대표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1억9천120만 밧(약 75억원)을 빌린 것은 정당법 위반이라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에 따르면 개인은 1천만 밧(약 3억9천만원)이 넘는 돈이나 자산 등을 정당에 기부하거나 주지 못하게 돼 있는 만큼, 법을 어겼다는 게 헌재의 설명이다.
그러나 헌재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도 만만찮다.
법학 부문에서 태국 내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탐마삿 대학의 법학자 수십 명이 헌재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정당 운영을 위한 대출이 정치권 관행인데 FFF만을 강제 해산시킨 것은 정치 보복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쏟아졌다.
여기에다 집권 세력이 사법기관을 활용해 정적을 탄압하는 고질적 행태가 그대로 반복됐다는 점에서 젊은 층의 실망감이 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FFP가 작년 3월 총선에서 군부 재집권 반대·구시대적 헌법 개정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젊은 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제3당을 차지한 정당이라는 점이 이들의 '분노 게이지'를 끌어올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 40여개 대학서 반정부 집회 양상…'세 손가락' 상징 부각
헌재 결정 다음날인 22일 '태국 민주화의 성지' 탐마삿 대학에서 항의 집회가 처음 열렸다.
이후 방콕은 물론 태국 전역에서 교내 항의 집회가 일주일 이상 계속됐다.
한 외신은 평소 '고분고분한'(docile) 태국 학생들이 기득권 정치 질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전역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현지 언론은 반정부 집회를 연 대학이 태국 전역에서 40개교가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애초 FFP 해산 항의를 위한 집회였지만, 바통이 이어지면서 점차 '군부정권 제2기'를 비판하는 반정부 집회 양상을 띠었다.
대학생 및 친 민주진영 인사들은 집회에서 군부 정권이 만든 헌법 개정을 촉구하고, 쁘라윳 짠오차 총리를 독재자라고 비판하며 퇴진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세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들며 저항 의지를 표현했다.
일부 집회에는 고교생도 참여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당시 해당 고교는 이들의 교내 집회를 불허하는 등 '화들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 2014년 반(反)쿠데타 저항 상징…'야당 탄압'에 다시 등장
'세 손가락' 인사는 지난 2014년 태국 군부의 쿠데타 당시 이에 항의하고 반대하는 표시로 사용됐다.
검지, 중지, 약지를 펼쳐 하늘 위로 향하게 하는 방식의 세 손가락 인사는 영화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2012)부터 등장한 제스처다.
독재 체제에 대한 반대 뿐만 아니라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저항하는 혁명의 상징으로도 해석된다.
시위대는 이런 의미를 담아 세 손가락을 높이 들어 쿠데타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후 세 손가락 표시는 온라인을 통해 쿠데타 반대 상징으로 급속히 확산했다.
당시 반군부 진영 운동가인 솜밧 분가마농은 페이스북에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드는 것은 기본적인 정치권리를 요구하는 상징이 됐다"며 "오전 9시, 오후 1시와 5시, 하루에 세 번, 세 손가락을 펴들자"고 촉구하기도 했다.




일부 네티즌은 세 손가락이 선거, 민주주의, 자유를 뜻한다고 풀이했는데, 그러자 인터넷에는 세 손가락에 각각 '쿠데타 반대' '자유' '민주주의'라는 글자를 적은 그림도 퍼지며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최고 군정기관인 국가평화질서회의(NCPO) 의장인 쁘라윳 짠오차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세 손가락을 치켜들지 마라. 정 하려면 집안에서 하고 외부에서는 하지 마라"며 경고할 정도였다.
실제 '세 손가락' 표시를 하다가 군부에 체포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군부정권이 영향력을 강화하고 정치 활동도 급속히 위축되면서 태국 사회에서 '세 손가락' 표시는 한동안 사라졌지만, 작년 총선 이후 재등장했다.
FFP가 젊은 층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일약 제3당에 오르면서 타나톤 대표는 야당 '맏형'격인 푸어타이당 후보군을 밀어내고 '야권 차기 대선 주자'로 단숨에 발돋움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정권 및 군부의 집요한 견제를 불러왔다.
군부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2015년 학생운동가에게 도주 차량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폭동선동 혐의'로 그를 고발했다. 4년 전 일을 들고나온 것이다.



타나톤 대표는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으면서 지지자들을 향해 '세 손가락'을 내보였다.
현 정권 및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점을 상징한 것이다.
그를 포함해 FFP 지도부는 이후에도 각종 소송의 표적이 됐다.
결국 타나톤 대표는 미디어 기업 지분을 가진 이는 하원의원직에 도전할 수 없는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11월 헌재에 의해 의원직을 잃었다.
정당 해산 위기까지 닥치자 타나톤 대표는 지난해 12월 SNS로 도심 집회를 전격 제안했다.
다음날 방콕 시내 중심부인 예술문화센터 앞에서는 2014년 쿠데타 이후 최대인 수천 명이 모여 '세 손가락'을 들며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이런 저항에도 불구하고 헌재는 결국 FFP 해산 결정을 내렸고, 타나톤 대표를 포함해 당 지도부 16명에 대해서는 정치 활동을 10년간 금지했다.
철저한 '반대 세력 싹 자르기'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본격적으로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며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 반정부 집회 숨 고르기…"계속할 것 vs 거리 나오지 말라"
대학가 반정부 집회는 지난달 마지막 날인 29일을 끝으로 일단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생들은 계속해서 반정부 집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공언해 '세 손가락'의 무게감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태국 국가안보위원회(NSC)가 "교내 반정부 집회를 거리로 가지고 나오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그만큼 '세 손가락 물결'에 집권 세력도 신경을 쓴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타나톤 대표는 지난해 말 의원직을 잃은 뒤 FFP 해산 가능성에 대해 외신기자클럽 간담회 등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이 해산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시민 분노는 실제로 있다. 폭풍이 올지도 모른다."
태국 전문가인 케빈 휴이슨 노스캐롤라이나대 명예교수도 헌재 판결 직후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이번 일은 군부가 후원하는 현 정권에 정치적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세 손가락' 물결에 호응해 의회 내에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학생 대표들을 의회로 데려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들어봐야 한다는 야당 의원들의 목소리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반정부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달 26~27일 18세 이상 태국 성인 1천26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니다(NIDA)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1%는 학생들이 법에 따라 집회를 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고 응답했다.
젊은이들이 펴든 '세 손가락'이 태국 정치권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south@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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