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 발빼기 연장선? 국면 전환용?…"향후 행보 지켜봐야"
(워싱턴=연합뉴스) 송수경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대한 책임론을 내세워 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WHO)에 대해 자금지원 중단의 칼을 뽑아 들었다.
취임 이래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국제 협약 등에서 잇따라 발을 빼고 동맹들에 대한 공격도 불사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국면을 맞아 세계 보건 문제를 이끄는 국제기구의 돈줄을 끊는 초강수를 꺼내 든 것이다.
미국의 WHO 자금지원 중단 카드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일 공개적으로 그 가능성을 내비친 이후 이번 주 현실화 가능성이 예고돼 왔다.
그러나 전 세계가 팬데믹 극복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할 시점에 코로나19 대응을 총괄하는 국제기구를 상대로 치명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점에서 큰 논란과 후폭풍이 불가피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WHO에 대한 미국의 평가작업이 60∼90일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고 미 언론이 보도했다. 이대로라면 최소한 2∼3달은 자금 집행이 끊긴다는 얘기가 된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미국은 WHO의 최대 기여국으로, 지난해 미국의 WHO 분담금은 4억 달러(약 4천900억원) 이상이었다. 중국의 분담금은 4천400만 달러였다.
WHO에 대한 이번 자금 지원 중단 지시는 충동적 스타일의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의 국제 리더십 실종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리스크'라는 말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CNN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결정은 국제기구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면서 탈퇴도 불사해온 정책 패턴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CNN은 유엔에 대한 미국의 자금 지원 문제제기, 파리기후협약 등 국제협약 탈퇴, 세계무역기구(WTO)에 대한 공격 등 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전력'을 거론하면서 국제기구들이 미국을 벗겨 먹어왔다고 끊임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불평해온 점을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WHO가 중국 편들기를 하며 상황의 심각성을 은폐·축소해 팬데믹 확산을 초래했다는 점을 이번 조치의 배경으로 꼽았다.
그러나 이번 극약처방의 이면에는 WHO '응징' 차원을 넘어선 국내 정치 상황이 자리잡고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초기 심각성 축소 및 늑장 대응 논란으로 미국내에서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WTO 책임론'을 통해 비난의 화살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국면을 전환해 대선을 앞둔 악재를 돌파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인 셈이다.
최근 코로나19 초기 대응의 난맥상을 지적하는 보도들이 잇따르자 트럼프 대통령은 '가짜 뉴스'라며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CNN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 행정부의 코로나19 대응 논란에 대해 방어하는 와중에 이번 자금 지원 발표가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트럼프 대통령의 책임론 전가 시도라고 보도했다.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트럼프 대통령의 WHO 책임론은 본인에 대해 제기된 코로나19 대응 논란이 커진 와중에 가속화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결정은 일단 역풍에 직면한 모양새이다.
민주당 크리스토퍼 머피(코네티컷) 상원의원은 WHO와 중국이 실수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초기 단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 치명적인 잘못에 대한 희생양을 찾으려는 백악관과 그 우군들의 합작품"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위기 초기 중국의 대응을 옹호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이제 와서 중국에 대해 유화적이었다는 이유로 WHO를 비난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라며 '오락가락 행보'를 꼬집었다.
미국 의사연합(AMA)은 성명을 내고 "팬데믹과 싸우는 일은 국제적 협력과 과학 및 자료에 대한 신뢰를 필요로 한다"며 "해결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WHO에 대한 자금지원을 삭감하는 일은 전세계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가운데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위험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향후 행보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관측도 있다.
미국이 팬데믹과의 싸움에 집중하는 주요 국제기구의 돈을 어떻게 중단할지, WHO 자금 지원 재개의 조건을 설정할지 등은 불확실하다고 WP는 보도했다.
hanks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