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대부자→최초대부자' 중앙은행론 재정립…증시-실물경기 디커플링
넘치는 유동성, 달러패권에 부메랑?…'달러화 강세' 역설 지속될까
(뉴욕=연합뉴스) 이준서 특파원 = "연준에 맞서지 마라"(Don't fight the Fed)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정책에 순응해야만 투자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월스트리트의 격언은 이번에도 유효하다. 일단 현재까지는 그렇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실물경기는 셧다운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증시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4월 한달 뉴욕증시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는 12.7% 올랐다. 월간 기준으로 1987년 1월 이후 최고 상승률이다. 기술주 주가지수인 나스닥지수는 15.5%나 치솟았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넷플릭스, 페이스북, 애플까지 'IT 공룡'들이 재택근무 환경에서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어딘가 어색한 급등세다.
정작 미국의 실물경제는 이제 막 폭풍의 영향권에 진입했다. 1분기(1∼3월) 국내총생산(GDP)은 4.8% 줄었다. 석 달 뒤에야 집계되는 2분기(4∼6월) 지표는 최악의 마이너스를 예고하고 있다. 소비, 판매, 생산, 주택 등 세부 지표들도 하나같이 곤두박질하고 있다.
미국의 일자리 상황을 체감적으로 반영하는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6주간 3천만건을 웃돌았다. 유통업계를 시작으로 파산이 잇따를 조짐이다. 유가마저 폭락하면서 '에너지혁명의 상징'인 셰일업계도 무너지고 있다.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의 반응 시차를 고려하더라도 뉴욕증시의 오름세는 다소 이른 감이 있는 셈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장 전망이 어려울 뿐 '사후적'인 해석은 가능한 법이다.
이르면 하반기부터 본격화할 경기 회복세를 선제적으로 반영한다? 렘데시비르를 비롯해 코로나19 치료제 또는 백신 개발에 진전이 있다? 기술적으로 과잉해석의 여지가 있는 실업수당과 달리, 메가톤급 고용충격으로 직결되는 대기업 연쇄파산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시장 분위기를 개선한 투자심리의 영역이라면, 주가지수를 끌어올린 핵심 동력은 연준의 유동성 공급, 쉽게 말해 '돈 풀기'다.
연준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의 '교본'을 따르면서도 기존의 틀을 훌쩍 뛰어넘었다.
대기업에 대해선 회사채를 사들이고, 중소기업에 대해선 메인스트리트 대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주택 시장에 대해선 상업용 주택저당증권(MBS)을 구입하고, 지방정부에 대해서는 지방채를 매입하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는 정크본드(투기등급)까지 영역을 넓혔다. 코로나19 사태로 갑작스럽게 투자등급 바로 밑으로 떨어진 '폴른 엔젤'(fallen angel) 등급으로 한정하기는 했지만 투기등급까지 지원하는 문은 열린 셈이다.
연준이 앞으로 주식이나 원유만 매입하면 된다면 얘기까지 농반진반으로 나온다.
물론 중앙은행이 유조선을 빌려 원유를 사들이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유에 투자하는 펀드를 지원하는 방식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중앙은행이 특정 종목의 대주주가 되지는 않겠지만 회사채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는 이미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서의 '금기'는 깨졌다. 코로나19 사태라는 전례 없는 충격에 맞서, 연준은 이미 '최초 대부자'로 역할론을 재정립했다.
"우리 권한의 절대 한계(absolute limit)까지 사용하겠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절대 한계'는 무한대에 가까워 보인다. 전통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합법적인 우회로를 통해서다. 재무부가 손실을 보전하는 조건으로 민간기업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연준법 13조3항(emergency credit)은 '전가의 보도'와 같다.
재무부가 제공하는 '종잣돈'으로 특수목적기구(SPV)를 설립하면 회사채부터 기업어음(CP), 지방채, 상업용 MBS까지 광범위하게 지원할 수 있다. 경기부양 패키지에 반영된 '재무부 자금' 4천540억 달러는 연준의 손을 거치면서 2조3천억 달러로 불어났다.
연방정부의 재정지출에는 연준이 '구원투수'로 나선다. 경기부양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국채 발행이 늘어나면, 양적완화(QE)에 돌입한 연준이 매수한다. 이자와 배당으로 재무부와 연준 사이에는 추가로 돈이 오간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거래하듯, 연준과 재무부가 달러를 주고받으면서 엄청난 신용이 창출되는 구조다. 재정적자의 경계심도 녹아내렸다. 파월 의장은 재정적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코로나19의 심각한 2차 발병이 닥치지 않는다면 경제와 증시는 서서히 체력을 되찾을 것이다. '브레턴우즈 협정' 이후로 76년간 유지된 '기축통화'의 위력을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새삼 느끼게 된다.
이쯤에서 질문의 초점을 바꿔보자. 급한 불이 꺼지면 다시 시선은 근본적인 이슈에 맞춰질 것이다. 바로 '달러의 미래'다.
돈이 넘치면 돈값은 떨어진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연준이 매입한 자산은 10조 달러까지 불어나고, 연방정부 재정적자는 올해 3조7천억 달러(의회예산국 추정)에 이를 수 있다. 통화가치를 유지하려면 유동성을 흡수해야 하지만 상당 기간 양적긴축(QT)은 쉽지 않아 보인다.
교과서적 원론만으로 달러의 운명을 논하기는 어렵다. 달러가 많이 공급될수록, 세계는 더 의존하게 되는 게 달러 기축통화 시스템의 역설이다.
미국은 무역·재정 '쌍둥이 적자'를 발권력으로 해결하면 된다. 무역적자로 세계 각국에 풀린 달러 유동성은 국채 투자를 통해 미국으로 되돌아온다. 달러가 휴짓조각이 된다면 각국이 보유한 달러 표시 외화보유액도 휴짓조각이 된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되레 안전자산의 가치가 부각된 '강(强)달러'를 위협할 후보군도 마땅치 않다. 유로화나 엔화도 과잉유동성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위안화 국제화도 지지부진하다.
미국이 1970년대 초반 원유시장의 달러 결제 시스템을 통해 '금 태환 중단' 위기를 극복하고 기축통화 지위를 지켜냈듯 또 다른 '창의적인'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넘쳐나는 유동성은 달러의 미래에 대해 끊임없는 의구심의 불을 지필 것이다. 언론에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위안화 국제화에 별다른 성과가 없는 중국 당국이 이달부터 '디지털 위안화' 시범운영에 들어간 속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j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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