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임 후 35년 외교관 생활 마무리…"외교관들 늘 겸손하길"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김상일(60) 주멕시코 한국대사가 부임한 것은 2018 러시아월드컵을 몇 달 앞둔 때였다.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강호 독일을 꺾고, 덕분에 같은 조 멕시코가 16강에 진출하자 멕시코는 갑작스러운 '한국 사랑'으로 가득 찼다.
대사관 앞에 수백 명이 몰려왔고 멕시코 내 한국인들은 감사 인사를 받기 바빴다. 김 대사에겐 멕시코 외교장관과 차관, 국회의장 등이 보낸 감사 편지와 테킬라 등이 도착했다.
김 대사는 "멕시코의 정을 듬뿍 느낀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축구 사랑이 엄청난 것도 있지만, 자국의 16강 진출에 기여한 한국에 갖은 방법으로 감사를 표시할 정도로 정과 유머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멕시코의 정을 느끼며 시작한 대사 생활 2년을 마치고 17일(현지시간) 귀임한 김 대사는 귀임 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월드컵이 공공외교의 반은 책임졌다. 효과가 1년은 더 갔던 것 같다"며 웃었다.
2년을 돌아보며 김 대사는 "멕시코라는 나라에도, 멕시코 친구들과 한국 교민분들, 대사관 직원들에게도 모두 고마웠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한국의 날' 제정이라고 했다.
1905년 에네켄(용설란) 농장 노동자로 멕시코에 이주한 후 어려운 처지에도 고국의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며 민족혼을 지니고 살아온 한인들과 그 후손들을 기리는 날이다.
유카탄주 메리다에서 한인 후손들을 만난 김 대사는 "선조들의 망국 한을 달래고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의 날 제정을 추진했고, 지난해 메리다와 캄페체시, 유카탄주에서 차례로 5월 4일이 '한국의 날'로 제정됐다.
김 대사는 내친 김에 멕시코 전역에서 한국의 날을 기념할 수 있도록 연방 의회 의원들을 설득했다.
지난해 12월 상원이 5월 4일을 '한인 이민자의 날'로 제정하는 데 합의한 후 하원 통과만 남겨놓은 상황이었지만 아쉽게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하원 통과도, 계획했던 한인의 날 행사도 미뤄져야 했다.
비록 김 대사 자신은 연방 한인 이민자의 날 탄생을 지켜보지 못하고 가게 됐지만, 어렵게 사는 한인 후손들에게도, 멕시코에서 생활하는 교민이나 이곳에 진출한 기업에도 '한국'의 이름이 들어간 기념일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길 기대했다.
김 대사는 "한국과 멕시코는 엮인 것이 많다. 함께 믹타(MIKTA·5개 중견국 협의체)를 구성하고 있고 자유무역협정(FTA) 논의도 진행 중이며 교민과 한인 후손도 많다"며 "양국 관계가 앞으로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멕시코는 김 대사의 마지막 근무지다. 1985년 외무고시(19회)에 합격한 김 대사는 귀임 후 내달 말이면 정년 퇴임한다.
스페인과 도미니카공화국, 영국, 벨기에, 미국 시카고 등의 공관을 두루 거쳤지만, 국내에선 외교부 의전 담당관, 의전 심의관, 청와대 의전비서관까지 7∼8년간 의전 업무를 담당한 베테랑 '의전맨'이기도 하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당시 고 김대중 대통령이 서명할 만년필을 급히 공수한 것도,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장소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제안한 것도 '의전맨' 김상일의 역할이었다.
김 대사는 "예전엔 의전이 형식적인 면에만 치중했다면 이젠 의전을 통해 무엇을 보여줄지, 어떤 정책 목표에 기여할지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의전을 해야 결국 통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별 볼 일 없는 외교관의 퇴임"이라며 인터뷰를 고사했던 김 대사는 35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돌아보며 "항상 겸손하고 머리를 숙이자"는 메시지를 후배들에게 전했다.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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